세시

이원

밥그긋과 그림자 사이
 

                시간

펑, 아스팔트 위에서 타이어 터지는 소리가 들린다. 길은 한 순간에 구겨진다. 구겨진 길을 덮치는 새떼들. 새떼들이 펑 소리를 뒤덮어 숨막힐 때 내 식탁 귀퉁이에 놓여 있던 밥그릇의 한쪽이 들린다. 그림자는 여전히 구겨진 세계에 붙어 있다. 비어 있는 밥그릇, 물방울은 떨어지다 멈춰 있고 시간은 더 깊게 비어간다. 만져보면 차갑게 멈춰 있는 밥그릇과 그림자 사이, 점점 길 끝으로 가파르게 지워지는


                부채

빚이 늘어간다. 동쪽의 죄가 늘어간다. 해는 죄에서 떠오른다. 손이 온통 썰렁하다. 버리지 못한 편지 봉투가 책상 위에서 혼자 펄럭인다. 비가 샜던 벽에 유난히 얼룩이 진다. 이런 날은 짜장면을 시켜 먹는다. 전화벨이 짜장면 가락처럼 시커멓게 울린다. 나는 받지 않는다. 계속해서 전화벨이 쌓인다. 아버지의 상여를 뒤따를 때 날 두들기던 요령 소리. 동그란 핏줄이 칼처럼 날카롭다. 피는 부채 탕감이냐. 나는 피냄새를 맡으며 뭉클하다


                내용

벽에 있던 거울을 떼서 TV 위에 올려놓는다. TV 위에 거울, 거울 옆에 달려 있는 달력, 달력 속의 폴 고갱의 그림. 거울 한쪽 구석에 붙어 있는 턱을 괴고 앉아 있는 꼬마 아이. 그 꼬마 아이를 떼내고, 5월에 머물러 있는 폴 고갱의 그림을 한 장 찢고 한쪽이 부러진 TV 실내 안테나의 다른 한쪽도 마저 망가뜨리는 것. 그것이 내가 오늘 중으로 해야 할 일이다. 집 안 곳곳에 올려져 있거나 쌓여져 있는 상자와 보따리들. 이고 강을 건너야 한다. 내용물은 솜이다.




환한 방


거울 속에 녹슨 기적 소리들이 쌓인다
거울 속에 구부러진 길들이 이리저리 쌓인다
짐을 끄는 낙타들의 발자국이 찍힌다
거울 속에 낯선 유리창이 쌓인다
거울 속에 아직도 모양이 남아 있는 것들이 이리저리 쌓인다
거울 석에 두 손으로 거리의 열쇠를 쥐고
정처없이 어둑어둑해지는 서쪽 하늘이 몸을 쪼그리며 쌓인다
거울 속에 더 이상 어두워질래야 어두워질 수 없는 곳
그곳에서까지 껌벅거리던 별들이 여전히 뒹군다
거울 속에 험하고 투명한 골짜기가 여기저기 패인다


 

철, 컥, 철, 컥
 
의자에 앉아, 그녀는, 현관문을 바라본다 닫혀진, 세계의 문 밑에서 소리없이 그림자가 멈춘다, 멈춘, 그림자가 세계를 덮친다 사라진, 세계 위로, 그림자가 움직인다 그녀는, 꼼짝 않고 그림자를, 쳐다본다, 철, 컥, 하는 소리가, 나더니 그림자가 없어진다, 계속해서, 그녀는 현관문을, 바라보며 컵에 물을, 따른다 세계가, 출렁, 거린다, 물소리는 텅 빈 길을 가지고 있다, 세계는 컵의 바깥으로 흘러내리기도, 한다 갑자기 급브레이크 밟는 소리, 컵을 강타한다 그녀는 침대에, 주저앉는다, 들춰진 이불 밑에 시간의 옷자락이 구겨져 있다, 그녀는, 한 손으로 이불을, 쓰다듬으며 현관문을 쳐다본다 가느다란, 빛이 들어오던 세계의 문, 밑으로 또다시 그림자가 드리운다, 점점 더 깊숙이 들어온다 방안이, 어두워진다 컵이 바싹, 마르며 타들어간다, 그녀는 수도꼭지를 튼다, 그 안에 끼였던, 세계가 쏟아진다, 세계는 그녀에게도, 튄다, 순식간에 세계를 껴입은 그녀, 손을 뻗어 시계를, 찾는다 손목시계가 석간 신문 밑에 깔려 있다, 그녀는, 문의 세계의 잠금쇠를, 쳐다보며 시계를, 쳐든다 세계, 안에서 디지털 시계가 철, 컥, 철, 컥, 사물이 없는 텅 빈, 시간 속을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