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동딸이던 시절

Kyoungsun Lim

Artwork by Yosef Phelan

엄마가 여자였던, 아빠가 남자였던 한 시절이 있었다. 더불어 내가 외동딸이던 시절이.

포르투갈 리스본대학교에 이 년 예정으로 포르투갈어를 공부하러 떠난 아빠는, 첫해 혼자서 유학 생활을 하다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듬해 엄마를 리스본으로 불러들였다. 오십 명도 채 안 되는 리스본의 한인 교민들과 이국에서의 적적함을 달래며 어울려 찍은 사진들을 보내올 때마다 묘령의 유학생 아가씨가 아빠 옆에 애교 있게 붙어 있었는데, 그것이 이 가족의 재회와 모종의 관계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빠가 엄마를 불러들였는지, 아니면 엄마가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 큰마음 먹고 가겠다고 나섰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엄마는 시부모님과 큰딸과 아들을 서울에 두고 막내딸인 나만 데리고 떠나기로 결심했다.

리스본 공항에 도착한 날, 아파트에 짐을 푼 후 나는 여행의 피로로 까무룩 낮잠이 들었는데 일어나서 보니 이미 밖은 노을이 지고 있었다. 처음 보는 낯선 방, 늘 언니와 좁은 방을 같이 썼던 터라 나만의 이 유럽식 인테리어 방은 생경하기만 했다. 천장은 너무 높고 침대는 킹 사이즈인 데다 벽에는 칙칙한 인물화들이 걸려 있어 나도 모르게 울먹거렸다. 조심조심 방문을 열고 복도를 한참 지나 안방 문손잡이를 틀어 문틈으로 엿보니 엄마와 아빠는 이불 속에서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불 밖으로는 맨 어깨가 드러나 있었다. 뜬금없이 엄마와 아빠가 고등학교 시절 ‘숀’과 ‘마리아’라는 이름으로 서로에게 연애편지를 썼다는 것이 기억났다. 엄마는 어린 나에게 편지를 꺼내 보여주며 자랑을 하곤 했다.

“선이, 깼어? 왜 울어……. 열 살인데도 우리 막내는 아직 아기구나.”

야단맞기는커녕 엄마는 귀엽다는 듯 나를 보고 미소 지었고, 아무렇지도 않게 웃옷을 걸치더니 아빠를 침대 밖으로 슬그머니 내몰고는, 문 앞에 서 있는 내게 뜨끈하게 데워진 그 빈자리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몹시 평화롭고 안도에 찬 엄마의 표정에 나도 안심이 되어 아기처럼 엄마 품에 안겨 잠을 마저 청했다. 그땐 미처 몰랐지만 그것은 아마도 내 동생이 생길 수도 있는 정황이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당시의 엄마는 지금의 나처럼 마흔이셨다…….

아빠가 남자구나, 그것도 꽤 잘생긴 남자구나, 라고 처음 의식한 것은 리스본에서였다. 그는 사슴 같은 눈망울에 수줍음이 더해진, 달짝지근하게 ‘예쁜’ 남자였다. 불과 일 년 전, 그가 서울에서 광화문 정부종합청사를 다닐 때 서류를 전하러 엄마와 함께 청사로 찾아간 적이 있었다. 감청색 양복에 흰 와이셔츠를 입은 그는 사무실에서 복도로 나와 인사도 안 하고 무뚝뚝한 표정으로 서류 봉투를 확인하고는, 막내딸 한 번 흘끗하더니 고개 끄덕이고 다시 사무실 안으로 사라졌다.

이곳 리스본에서는 온화한 포르투갈 날씨에 걸맞게 구깃구깃한 면셔츠에 면바지, 그리고 어깨에는 빨간색 울스웨터를 두르고 가끔은 겉멋으로 뻥끗뻥끗 담배를 태우기도 했다. 집에서는 리처드 클레이더만의 피아노 앨범이나 아바의 골든 앨범을 들었고 취미로 찍는 들꽃 사진을 보며 색연필로 스케치를 하기도 했다.

결혼을 일찍 한 아빠는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이른 나이에 아이 셋을 책임진 것 같았다. 서울에 남아 중학교를 다니고 있던 언니와 오빠한테는 미안한 얘기지만 내가 첫째로 태어났어야 저 남자는 숨통 트여 살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이것으로 당시 외동딸로서 내가 누렸던 여러 특권들을 합리화할 수 있을까?

방과 후의 풍경은 늦깎이 유학생에게 제법 평화롭고 나른했다. 대학 수업이 일찍 끝나 나를 직접 데리러 오는 날에는 4학년 담임이었던 존 선생님과 일대일로 해가 저무는 가운데 농구 게임을 벌이기도 했는데, 나는 그 모습이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었다. 물론 실력 면에서, 체력 면에서 아빠는 단연 존 선생님보다 못했다. 미국인이니 학부형이라고 일부러 져주고 봐주지도 않았다. 그러나 서툰 대로 아빠는 웃고 뛰고 놀고 땀을 흘렸다.

도보 거리인 카르나시드Carnaxide 지역의 아파트로 아빠 손을 잡고 귀가하노라면 양떼지기가 수십 마리의 양떼를 몰고 그 역시도 퇴근하고 있었다. 양떼를 가로질러 집에 도착하면 엄마는 자주, 어울리지 않게 나른한 목소리로 외식을 하자고 아빠를 부추겼다. 우리 셋은 다시 신을 신고 집을 나서 부근의 작은 해물요리 식당에서 지글지글 갓 구운 정어리구이나 달팽이찜 혹은 담백한 대구구이와 감자찜을 먹었고 아빠는 원 없이 포르토Porto 와인을 마셨다.

여름날엔 엄마 손을 잡고 매일 리스본 해변에 가 시간을 보냈다. 비치타월 외엔 딱히 준비할 게 없었다. 나의 열 살짜리 몸은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났다. 자고 일어나면 키가 한 뼘씩 커져 있었다. 가슴은 봉곳 솟아나려고 꿈틀대고 젖꼭지는 간질거렸다. 엉덩이만은 여전히 작고 납작해서 뒤에서 보면 소년 같은 일자 몸매였다. 머리도 쇼트커트로 친 나를 굳이 여자아이로 구분 지으려고 엄마는 꽃무늬 원피스 수영복을 입혔다. 모래는 입자가 미세하게 고와 비단처럼 매끄러웠고, 태양은 부담스럽지 않게 몸을 휘감듯 적절히 따뜻했다. 바닷물은 늘 어딘가 미지근하게 데워진 상태였다. 왜 그렇게 모든 것이 몸에 편안하게 딱 알맞았을까? 나는 뭍에서 모래성을 쌓고 노는 것보다 내내 물속에 있는 것이 좋았다. 그런 것치고는 수영을 못해서 쉴 새 없이 파도를 타고 뭍으로 쓸려오는 것을 반복하며 놀았다. 쓸려 올 때마다 손가락 마디마디에 해초가 붙어 나왔다.

햇살에 얼굴이 벌겋게 익고 입술이 소금기에 절어서 짭짜름하다 못해 부르트려고 해도, 엄마는 내가 스스로 물 밖으로 나오기 전까지는 해변 파라솔 아래에서 챙모자를 쓴 채 가만히 쉬고 있었다. 해가 지기 시작해서야 비로소 딸을 찾으러 물 가까이 왔다. 밤이 다가오니 순식간에 아까와는 사뭇 다른 한기가 느껴졌다. 엄마는 큰 비치타월을 내 몸에 돌돌 말아서 말리고 작은 타월로는 머리를 감싸 박박 물기를 빼냈다. 그동안 나는 점점 거칠어지는 파도소리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내일도 다시 이곳에 올 수 있게 해주세요, 나는 기도했다.

리스본대학교가 여름방학에 접어들자 세 가족은 남유럽 일주 여행을 떠났다. 황갈색 중고 푸조 자동차 트렁크에 된장과 고추장, 버너, 코펠을 싣고 가족은 달렸다. 자동차 여행의 낭만에 대해 사람들은 이야기하지만 자동차 유럽 여행을 이루는 것은 사실 낭만보다는 노동이었다. 자동차 여행의 특징은 자동차 안에서 보내는 시간, 즉 ‘달리는’ 시간이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그나마 곧 어떤 도시에 도착한다는 도로 안내판을 만나면 그것이 달리기를 드디어 멈춘다는 안도의 신호였다.

때로는 불쑥, 아무 예고도 없이 자동차는 갓길에 멈춰 섰다. 그런 후 엄마와 아빠는 내려서 아무 말 없이 적당한 나무 그늘을 찾았다. 대개 아담한 크기의 올리브나무 아래였다. 메뉴는 예외 없이 흰밥, 감자와 양파를 넣은 된장찌개, 그리고 고추장. 가끔 엄마가 풀밭 쪽으로 더 들어가서 고사리라도 발견하는 날이면 세 가족은 잠시 모든 여정을 잊고 고사리 캐는 작업에 몰두했다. 다음 끼니는 그렇게 고사리나물밥으로 변신했다. 밥이 물리면 바게트에 에멘탈 치즈와 햄을 끼워 먹기도 해서 중간중간 자동차 매트를 탈탈 털고 다녀야 했다.

근 삼 주간 여행을 다녔는데도 그사이 내가 무엇을 먹고 다녔는지에 대한 기억은 그 세 개의 메뉴와 또 하나, 스위스 국경에서 먹은 심플한 볼로네즈 스파게티가 다였다. 멀쩡한 식당에서 먹는 밥이 너무 오랜만이라 스파게티가 눈물 나도록 맛있었던 나는, 파르메산 치즈 가루를 뿌리는 것도 잊었다는 것을 먹고 나서야 깨닫고 그것 역시 눈물 나도록 속상해했다. 한 끼 식사에 대한 과잉된 기쁨과 분함의 기억이다.

낮에는 도시에 차를 멈추고 걸어서 돌아다녔지만 밤이 어두워지면 시간을 아끼기 위해 아빠는 시속 120킬로미터로 컴컴한 고속도로를 달렸다. 밤이면 밤마다 이어지는 지루한 밤길 드라이브에 지친 나는 그 흔들림 속에서 어슴푸레 잠이 들고 또 들었다. 잠결에 엄마 아빠가 나누는 대화 소리가 환청처럼 들렸지만 그것은 대개 아빠 졸지 말라고 엄마가 일부러 말을 거는 것이었다. 원래 두 분 다 말수가 많은 편도 아니었다. 고속도로를 한창 달리다가 차를 갓길에 세워놓고 아빠와 엄마가 의자를 뒤로 젖혀 한두 시간 눈을 붙일 때면, 하필 나 혼자만 말똥말똥 잠이 안 와 내가 기댈 곳은 엄마 아빠의 얕은 숨소리뿐인 이 적막 속에서 그저 숨을 죽이고 다이아몬드처럼 알알이 박힌 밤하늘의 하얀 별들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심야에 가까운 시간, 졸음이 엄습해오기 전에 다행히 작은 소도시에라도 도착하면 아빠는 속도를 낮추고 눈에 띄는 별 한두 개짜리 호스텔 앞에 멈추었다. 삐걱거리는 계단이나 스프링이 나간 침대, 마귀할멈처럼 생긴 당직 지배인이 싫고 무섭고 잠이 잘 안 온다고 나는 투덜댔지만, 웬만한 것은 다 무시되고 덜컹거리는 침대 하나에서 셋이 나란히 비좁게 잠을 청했다. 그렇게 전반적으로 비위가 강했던 엄마 아빠도 식겁해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 때가 있었다.

“나가자. 다른 델 가봐야겠다.”

녹슨 철 소재의 침대와 병원 침구 같은 리넨, 거뭇거뭇하게 낡아서 곰팡이가 슨 벽지, 변기 안에서 중세 유럽 귀신이 나올 법한 비좁은 화장실을 보고는 방을 안내해준 지배인과 눈도 못 마주치고 “Pardon”이라 말하고 가족은 후다닥 도망쳐 나왔다. 정작 지배인은 그런 반응 그리 낯설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지만. 다른 호스텔을 찾아야만 하는 아빠는 힘없이 차에 시동을 걸었다.

유럽 자동차 여행 때 찍은 사진들을 보면 엄마와 내가 피곤한 얼굴에 같은 포즈로 배경만 바꾸어 찍은 것이 태반이다. 밤에 자다 깨다를 반복하니 낮에 늘 비몽사몽 졸린 모습으로 대성당과 박물관, 미술관 등을 보러 다녔던 것이다. 고작 열 살이었기 때문에 솔직히 당시 내 앞에 펼쳐진 많은 역사와 예술의 산물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아무리 대가의 작품이라 한들 너무 많이 보다 보면 물리는 감도 없지 않았다. 나는 자주 그 특정 공간에서 유일한 눈 찢어진 동양 아이였기에 견학 나온 현지의 유치원생들로부터 “씨네즈!(중국 사람이닷!) 씨네즈!”라는 놀림을 받곤 했지만 그것이 차라리 당시의 지루함을 해소해주었다. 그럼에도 그 시절, 내가 무언가 무척 아름다운 것을 접했다는 감촉만은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있다.

그러나 정작 내 영혼에 어떤 ‘작용’을 한 것은 미켈란젤로나 피카소나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아니라 올리브나무 잎사귀의 형언하기 어려운 아련한 초록색이라든가, 트렁크에서 꺼내 뚝딱 끓여낸 된장찌개의 떫은 맛이라든가, 낯선 도시에 도착할 때마다 어렴풋이 달랐던 공기의 습도나 내음이라든가, 어린 날의 설익고 부드러운 내 몸을 찰싹 맵게 때리고 도망가던 파도의 그르릉대던 소리 같은 것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