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행

황석영

Artwork by Vladimír Holina

그렇게 소풍 가듯 떠나온 고향을 다시 찾은 것은 사십여 년 만인 1989년이었다. 방북 이야기에 앞서 나는 그보다 몇 해 전 내가 처음 나 라밖으로 나갔던 1985년의 경험을 얘기할 필요가 있다. 그때의 경험이 내가 방북을 결심하게 된 큰 동기였기 때문이다. 1967년에 해병대로 베 트남에 갔었지만 당시에는 부대 주둔지 외에는 다른 지역으로 갈 수 없 는 군인이었으니 바깥 세계를 경험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일제강점기 때는 기차나 배를 타고 만주를 거쳐 시베리아와 유럽에 까지 갈 수 있었지만 분단 이후 남한은 위로는 휴전선이 가로막고 있 으며 삼면이 바다여서 섬이나 마찬가지다. 한국에서 해외여행 자유화 가 시행된 것은 1989년부터였으며 이전에 일반인은 해외로 나가는 것 이 허락되지 않았다. 여행 자유화가 이루어지기 몇 년 전부터 이른바 상 용 또는 문화 여권이라고 해서 외국의 초청장을 받은 경우에 한하여 대 기업 회사원과 해외 공연이나 전시에 참가하는 문화인에게 단기여권을내주었다. 당시에는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신원조회’였는데 여권 신청자가 약간의 법적 정치적 문제라도 있으면 발급이 거부되었다. 다행히신원조회를 통과했다 할지라도 이른바 ‘소양교육’이라고 해서 일정 기간 정보기관의 안보교육을 받고 그 수료증을 첨부해야 했다. 특히 미국을 가려면 비자를 받아야 했는데, 세금납부증명서와 재정보증이니 초청장이니 각종 서류를 제출하고 까다롭기 짝이 없는 미국대사관 면접을 통과하기까지 수개월씩 걸리는 일이었다. 여권을 갖는 일 자체가 특권이었던 셈이다. 내가 나가던 무렵에는 과거의 통과의례는 다소 느슨해져 있었고 경제와 문화 분야의 출국에 대하여 문호가 열리던 때였다.그렇지만 신원조회는 과거와 달라진 점이 없었으므로 반정부 인사였던나 같은 사람은 애초에 해외 출국은 꿈도 꾸지 못할 처지였다. 그 무렵에 나는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라는 광주항쟁에 대한 실록을 출판하게 되고 그로 인해 첫 출행길에 오르게 된다.

1979년 종신집권체제를 강압적으로 끌고 가던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하여 암살되자, 군 보안장교들은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하고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독재자의 죽음을 계기로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전국으로 확산되자 신군부는 이듬해인 1980년 계엄 해제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광주 시민들 수천 명을 무차별 살상했다. 광주에서 시민들은 자기를 방어하기 위해서 무장을 하고 십여 일동안 포위된 광주의 치안을 유지하며 도청을 중심으로 저항했다.광주항쟁이 무자비한 진압으로 종결된 뒤에 우리는 이 사실을 한국국민과 세계에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당시에 모든 언론과 매스컴은정부의 ‘보도지침’에 묶여 있었고 일상적인 검열의 덫에 걸려 있었다.광주 참사에 대한 보도는 이따금 종교단체를 통해서 흘러들어오는 외신에 의해 일부 사람들만 몰래 접할 수 있었다.

나는 1970년대부터 전국적으로 문화운동조직을 결성했는데 이들문화 일꾼들은 학생, 교사, 문인, 예술가 등 지식인에서 차츰 현장의노동자 농민들로 참여 계층이 확대되었다. 문화운동조직의 첫번째 임무는 여러 가지 매체를 동원하여 광주의 진상을 대중에게 전파하는 일이었다. 여러 가지 현대적 장치가 동원되는 극장 공연을 할 수 없었던우리는 먼저 마당극이라는 형식을개발하여 마을이나 공장의 공터 아무데서나 순회공연을 했고, 노래를 만들어 악보와 가사를, 나중에는카세트테이프를 제작하여 보급했다. 화가들은 판화를 찍었고, 미디어에 눈뜬 젊은이들은 사진, 8밀리 영화, 비디오 등으로 서툴지만 인상적인 장면들을 복사하거나 담아냈다. 이들은 훗날 유명한 연출가, 극작가, 문인, 작곡가, 가수, 배우, 화가, 영화인 등으로 성장하게 된다. 광주항쟁 5주년을 앞두고 우리는 보다 정확하게 진실 규명을 해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광주에서는 대략 세 개의 팀이 항쟁의 각종 자료들을 모아나가고 있었다. 이들은 외신, 검열에 걸려 누락된 국내 기자들의 보도, 사진, 영상 등을 모으고 무엇보다도 항쟁에 참여하거나목격한 각계각층의 시민들의 증언과 체험담을 개별적인 인터뷰를 통하여 수집했다.

당시 내 두 아이의 엄마이자 아내였던 홍희윤은 활동가와 구속자의부인들이며 교사, 사회단체 직원 등으로 구성된 광주 여성회 ‘송백회’를 맡고 있어서 자금을 모아 자료팀을 뒷바라지하고 있었다. 나는 내게넘겨진 기록을 간추리고 줄거리를 구성하여 압축하는 작업을 했다. 자료 수집과 기록에 참여한 젊은이들은 나와의 직접 접촉을 끊고 ‘현대문화연구소’의 정용화와 전용호가 그들과 나 사이에서 연락을 해주었다.현대문화연구소는 그 무렵 미국으로 밀항하여 망명한 윤한봉과 내가1979년에 창설했는데, 항쟁 이후 겉으로는 모두 해산된 것처럼 연구소를 폐지했지만 기능은 지하에서 그대로 돌아가고 있었고 정용화가 3대소장을 맡은 상태였다.

나는 모아진 자료를 들고 서울에 올라와 출판사 근처에 방을 정하고 한 달 동안 최종 정리 작업을 했다. 먼저 배포된 팸플릿이 대학가로퍼졌고 선발된 서울의 각 대학 활동가들이 미국문화원에 들어가 농성했다. 광주 진압을 위한 군대 파견은 한반도의 작전지휘권을 가진 미국의 암묵적 동조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며 따라서 신군부의 배후인미국의 책임임을 국내외적으로 부각시키자는 의도였다. 예정대로 책은 5월 초에 출판되었는데 용기 있는 인쇄업자를 만나 초판 이만 부를찍어 서점에 배포하기 시작했다. 출판을 맡은 풀빛출판사 나병식 사장은 민청학련 이래 두 차례나 수감된 경력이 있어서 열흘쯤 피해다니다가 자수했고, 나는 그가 수사를 다 받고 사건의 윤곽이 나올 때까지 한달쯤을 도망다니기로 했다.

책이 풀려나가자 온 세상이 발칵 뒤집힌 것 같았다. 광주에서는 우리집에 합동수사반이 들이닥쳐 온 집안을 샅샅이 뒤졌고 화단까지 파헤쳤다. 현명한 홍희윤은 자료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미리 마당 한켠에 있던 허름한 창고 건물의 슬레이트 지붕을 걷어내고 그 밑에 깔아놓았다.그들은 창고도 뒤졌지만 얇은 합판 천장은 뜯어내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서울 외곽에 사는 후배 문인들의 집을 전전하며 시간을 보냈다. 시중에 풀려나간 책의 절반쯤이 다 팔리기도 전에 압수당했지만 곧당시에 널리 보급되기 시작한 복사기로 해적판이복사되어 새끼를 쳐가며 퍼져나가고 있었다. 한 달쯤 지나서 나는 전화를 걸어 자수했고안기부로 끌려가지 않고 중부경찰서에 수감되었다. 남산과 가까운 거리여서 안기부 수사관들이 경찰에내려와 수사 지휘를 하고 있었다.그들은 나를 안기부에서 조사하는 것을 피하려 했는데 신군부의 가장큰 약점이던 광주 진압과정의 소문이 대중에게 일파만파로 퍼져나갈것을 우려했던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나를 조사하면서도 1970년대에 국내외로 파장이 커진 시인 김지하의 구속 사태를 예로 들면서 내행위가 유언비어 유포에 지나지 않는 작은 일이라는 것을 애써 강조했다. 그 무렵에 대학가에 번지기 시작한 시위로 유치장마다 잡혀온 학생들이 가득했는데, 그들은 내가 젊은이들과 함께 있으면 좋을 게 없다고판단했던 것 같다. 그뿐 아니라 사회 각계서 유치장으로 나를 면회하러 오는 인사들이 많아지자 더 시끄러워지기 전에 급히 수사를 마무리하고는 나를 중심가에서 먼 변두리 경찰서로 옮겼다가 다시 공항 부근의 출입국법 위반자를는 시설로 옮겼다. 입감되던 날 옆방에서영국 여자가 헬로, 하면서 인사를 건넸다. 그녀는 홍콩에서 여행을 왔고 누군가 돈을 주면서 물건을 전해달라고 해서 무심코 가방에 넣어왔는데 그게 마약이더라고 했다. 영국 여자는 눈물을 흘리며 후회했다.그 옆방에는 중동 사람 두 명이 들어와 있었다.

일주일쯤 지나서 누군가 나를 불러냈다. 그는 안기부 요원이었는데말이 별로 많은 편은 아니었다. 당국에서는 이번 사건을 유언비어 유포로 보는데 경범죄여서 처벌은 현행법상 구류의 최고형인 이십 일 구금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이튿날 정식 재판을 받을 예정이었다. 그가 뭔가 종이 두어 장을 내게 내밀었다. 들여다보니 독일어와 영어로 된 초청장이었다. 서독 베를린에서 당신에게 초청장이 왔는데 출국시키라고 어찌나 성화인지 우리도 골치가 아프다고 그가 말했다. 공연히 국내에서 시끄럽게 하지 말고 조용히 외유나 다녀오겠다면 당국에서도 허용할 의사가 있다고 했다. 그 사내는 한번 더 나를 찾아왔다. 나는 유치장 안에서 여권을 위한 서류를 작성하고 지문 찍고 사진도찍었다. 석방되는 날 나는 영치되어 있던 여권과 독일에서 보낸 비행기 표를 받았다.

그날 광주에서 올라와 나의 석방을 기다리고 있던 홍희윤과 만났다.우리는 서울에서 하룻밤 같이 지내고 이튿날 백화점과 남대문시장에가서 옷가지며 가방 등속을 샀다. 홍희윤은 어린 아들과 딸을 이웃에돌봐달라고 맡기고 온 터여서 저녁차로 돌아가야 했다. 그 무렵에 우리는 많이 지쳐 있었다. 그녀와 나는 광주에서 수년째 주부와 소설가이외에 사회운동가로 제각기 뛰어다녔다. 우리는 몇 번이나 번갈아 연행되거나 조사를 받았고 아슬아슬하게 구속을 면하곤 했다.우리가 전라도로 하방한 것은 1976년이었는데 문화운동조직의 전국화가 이루어지던 초기여서이 무렵부터 나는 일 년에 몇 차례씩, 길게는 한 달에서 짧아도 보통은 열흘 이상씩 집을 비우는 일이 많았다.홍희윤은 언제 귀가할지 모르는 나를 기다리다가 구속된 후배들의 아내들과 어울려 여성회 모임을 꾸렸을 것이다. 우선 정치범들의 옥바라지를 시작했는데 이를테면 털실로 양말과 장갑을 짜서 전국의 정치범들에게 보내고 영치금을 모금했다.

내가 집에 있을 때는 연재중인 소설의 원고를 쓰느라고 식구들과 외식 한 번 제대로 했던 기억이 없다. 더구나 밤에 일하고 낮에 자는 불규칙한 습관 때문에 하루 한끼를 함께 먹기도 쉽지 않았다. 모두 내 잘못이었지만 언젠가부터 밥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으면 서먹한 침묵이 둘 사이를 지배했는데, 어느 누구도 그것을 깨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밥을 먹는 날이 계속되었다. 그날도 강남의 버스터미널까지 내가 배웅해야 했건만 함께 저녁을 먹은 식당 앞에서 나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미안해, 될 수 있으면 편지 자주 할게.”

내가 행정적인 일에 무능한 탓도 있었지만 당시에는 지방에서 전화놓기가 어렵던 시절이라 우리집에는 그때까지도 전화가 없었다. 내 주위 사람들도 모두 “까짓것 전화 놓으면 뭘 해, 매일 도청이나 당할 텐데” 하고 자위하던 형편이었다. 홍희윤은 그때 무슨 예감이 있었는지눈시울이 붉어지더니 돌아서서 얼른 물기를 훔쳐냈다.

“왜요, 걱정돼서 그래?” 내가 좀 당황하여 말했더니 그녀가 곧 냉정한 얼굴로 돌아가며 말했다. “어쩐지 오래 걸릴 것 같네요. 하여튼 잘다녀오세요. 술 많이 드시지 말구.”

그녀가 택시를 타고 떠났고 나는 잠시 길 위에 서 있었다. 그때는 그것이 우리의 결별의 시작이 되리라고는 알지 못했다. 지금도 그날을생각하면 가슴이 막힐 것 같은 압박감과 함께 깊은 회한이 밀려온다.


*

분단된 상태이던 1985년의 베를린은 동독 안에 섬처럼 고립된 도시였다. 아니 정확하게는 2차대전 승전국의 점령 도시였다. 베를린의 침울하고 한적한 분위기 속에 높게 서 있던 장벽이 몇 년 후 무너지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하던 때였다. 훗날 나는 베를린에 갈 때마다 독일의 수도임에도 한국에서 그곳까지 직항기가 없다는 것에 어리둥절해하면서 이때 목격한 회색빛 장벽을 떠올리게 된다.

해외에 처음 나온 벽지의 촌뜨기로서 유럽에 들어섰을 때 나는 ‘내가 누구인가’ 자문했고 그것은 나의 질문이 아니라 당연히 유럽인이내게 묻게 될 질문이었다. Who are you? 나는 우리 나이로 마흔세 살이었다. 당시 네 권의 중단편집과 한 권의 희곡집을 냈고 1974년부터십 년 동안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으며 연재한 『장길산』 열 권을 막출간했던 참이었다. 그러나 나도 내 작품도 바깥세상에서는 존재하지않았다. 나는 비행기 안에서 내 문학 이야기 따위는 꺼내지도 말고 우리 땅에서 고통받는 수많은 사람들과 광주의 이야기를 전파할 것을 스스로 다짐했다.

현지에 도착해서 행사 주최측의 일을 분담받은 한국인 유학생들을만났다. 그들은 1960년대에 광부와 간호사로 취업한 재독동포들의 후원과 도움을 받고 있었다. 그들 모두가 그렇지는 않았지만 많은 광부와 간호사들은 계약이 끝난 다음에 독일에 남아서 학업을 계속하거나다른 직업을 구해 살아왔다. 그중에는 독일인과 결혼하거나 의사, 교사, 기술자, 사업가 등으로 독일 시민사회의 일원이 된 사람도 많았다. 이들은 노동 현장에 있던 초기에 독일인들의 도움으로 노조라든가 인권운동, 사회운동의 세계를 알게 되었고 유학생들의 영향을 받아 유신독재와 광주항쟁 등 한국 민주화운동의 실상을 접하게 되었다. 이들은스스로 모임과 조직을 만들었으며 공부가 끝나면 한국에 돌아가야 할학생들보다도 어떤 면에서는 더욱 급진적으로 의식화된 면이 있었다.이들 모두가 군사독재정부의 한국 대사관에서 볼 때는 불온분자들이었다.

호텔에 도착해보니 동료 소설가 윤흥길과 문화운동가 임진택이 며칠 전에 먼저 와 있었다. 베를린에서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제3세계문화를 집중적으로 소개하는 ‘호리존테horizonte’라는 문화기획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자료를 보니 지난 회 주제가 라틴아메리카였고 그전회는 아프리카였다. 그해 ‘호리존테 85’는 아시아 문화가 그 초점이었다. 우리 세 사람 이외에도 진도 씻김굿, 민속악과 국악 공연, 전시회등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 행사는 1부에 임진택과 독일의 볼프 비어만이 공연하고 2부에 윤흥길과 내가 작품의 부분 낭독과 대담을 하는 순서였다. 임진택은 김지하와 내가 시작한 문화운동 1세대의 한 사람인데, 마당극과 실험적 판소리의 연출자 겸 공연자로 오랫동안 함께 일했다. 그는 춤의채희완과 이애주, 노래의 김민기 등과 더불어 문화운동의 시초부터 끝까지 함께해온 문화활동가였다. 임진택은 김지하의 담시 「소리내력」을신판 판소리로 편곡하여 스스로 노래했다. 김지하의 「소리내력」은 「오적」과 함께 박정희 유신독재를 정면으로 비판하여 시인 자신이 구속되고 민청학련 사건과 연루되어 사형 구형까지 받게 한 유명한 풍자시였다. 그로 인해 해외 문인, 지식인들의 김지하 구명운동이 전 세계적으로 이루어져 오히려 한국 군사독재의 압제를 극명하게 드러낸 결과가되었다. 신군부는 그맘때쯤 김지하를 석방했지만 그의 시집은 여전히판금된 채였고 그는 병원을 들락거리며 후유증을 치료하고 있었다.

볼프 비어만은 공산주의 활동가였던 부모에게서 태어났는데, 유대계였던 그의 아버지는 나치에게 체포당해 수년간 옥살이를 하다가 아우슈비츠에서 처형당했다. 비어만은 1953년 17세의 나이에 홀로 고향 함부르크에서 동독 베를린으로 이주했다. 그러나 진정한 공산주의실현과는 거리가 먼 동독의 현실에 반감을 느끼고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시와 노래로 표현하여 동독 정부로부터 비우호적 인물로 낙인찍힌다. 브레히트가 창설한 베를린 앙상블 극장의 조연출을 했고 노동자와 학생이 중심이 된 극단을 창설했지만 검열에 의해 공연 금지를 당한다. 첫 시집 『철삿줄 하프』가 반국가적이라 지목되어 비어만은 공연금지와 함께 가택연금에 처해져 십일 년이나 활동을 금지당한다. 그런그가 1974년 서독에서 오펜바흐 상을 받고 1976년 쾰른의 금속노조초청으로 공연하자 동독 정부는 비어만의 시민권을 박탈하고 입국을불허한다. 이를 계기로 동독의 많은 지식인들이 정부를 비판하기 시작했고, 작가 열두 명이 비어만의 추방령에 반대하는 공개서한을 발표한다. 나는 이들 열두 명 중에서 우연하게도 자라 키르슈, 크리스타 볼프, 슈테판 하임 세 작가를 만나게 된다. 자라 키르슈는 서독으로 나온뒤여서 그해 함부르크에서 우연히 만났고, 동독에 남아 있었던 크리스타 볼프는 방북 이후 내가 베를린으로 망명했던 시절 장벽이 해체된그 겨울에 만났다. 슈테판 하임은 2001년 그가 죽기 몇 달 전 노르웨이의 트롬쇠에서 열린 노벨평화상 100주년 기념 문학 심포지엄에서 만난다. 비어만의 시민권 박탈과 추방이 동독 사회에 끼친 충격은 매우깊고 오래갔다. 비어만 사건이 장벽 붕괴의 시발점이 되었다는 논평도있었다.

당시 내가 아는 동독 작가의 소설은 한국에 소개된 우베 욘존의 『야콥에 대한 추측』이 유일했다. 크리스타 볼프의 『나뉘어진 하늘』이 동독에서 나온 것은 1963년이었지만 한국에 소개된 것은 훨씬 뒤인 1989년이었다. 나는 이들의 작품을 읽으면서 남한의 상황이 서독보다는 동독과 더 비슷하다고 느꼈다. 1953년 6월 동독의 노동자 봉기는 소련의 탱크에 의해 무참하게 진압되었다. 이후 동독은 비밀정보기관 슈타지의일상적인 감시와 철통같은 통제를 받으며 스스로 장벽을 쌓고 자폐된체제 속에서 살아갔다. 그 시기의 브레히트 시집 『부코 비가』에 나오는시편들을 나는 기억하고 있었다.

군사독재 치하의 남한이 동독과 어느 정도 비슷했다면 북한은 동독과도 한참 거리가 먼 체제였다. 늘 하는 얘기지만 북한은 미국의 수십년에 걸친 봉쇄에 의하여 연속적인 위기 속에서 ‘농성체제’가 되었고통제와 긴장으로 유지되는 나라였다. 북한 사회에서는 동독과 같은 정도의 비판적인 관점을 지닌 작품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있다. 그렇지만 한국이 서독과 같은 민주사회를 이루지 못하는 한, 북한을 비난할 수도 없고 변화시킬 수도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당시 한반도처럼 두 개의 세계로 나뉘어 있던 독일을 처음 방문했을 때의 경험과, 이후 1989년 북한을 방문한 뒤 망명한 시기에 장벽이 무너지고통일이 이루어지던 베를린에서 몇 년간 체류한 일은 나의 세계관에 큰영향을 주게 된다.

비어만은 기타를 반주로 하여 자신의 시를 음유시인처럼 노래했고,임진택은 정든 고향을 떠난 이농민이 도시빈민에서 반사회적 범죄자로 몰려 죽는 이야기를 풍자적인 판소리에 담아 고수의 장단과 함께노래했다. 솔직히 그는 연출자이지 정식 판소리 소리꾼은 아니었지만,혹시라도 누군가 그렇게 얘기하면 그의 얼굴에는 금방 서운한 기색이역력했다. 나는 유일하게 독일어로 번역된 「삼포 가는 길」을 낭독하고나서 「한씨연대기」의 이산가족과 전후복구시대의 빨갱이 사냥에 대해말했고, 윤흥길도 자신의 단편소설을 읽은 뒤 중편 「장마」에 나오는 가족들끼리의 이념적 갈등과 화해에 대해 이야기했다.

행사 뒤에 광부 출신으로 공부하여 박사학위를 얻은 이아무개가 방문할 데가 있다면서 나를 자기 차에 태웠다. 베를린 외곽의 반제 호숫가 동네에 작곡가 윤이상 선생의 집이 있었다. 집 앞에는 ‘예술가의 작업실이 있으니 그의 창작을 돕기 위해 자동차의 경적을 울리지 말라’는 팻말이 붙어 있어서 베를린의 관청은 참으로 근사하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훗날 나는 이 집에서 망명 초기의 몇 달을 보내게 된다.“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닙니다.”

처음 만나서 인사하자마자 윤이상 선생은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나는 당황하여 말했다. “저에게 그런 말씀 하실 필요 없습니다.”

1967년 그가 구속되었던 일로 누군가 그를 변호한 글을 읽은 기억이 있었는데, 그는 공산주의자가 될 수 없으며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그의 현대음악적 형식과 기법이 반공산주의적이라는 것이었다. 소련을 비롯한 당시의 사회주의권에서 현대음악의 무조성과 전위적 실험들을 미술에서의 추상화처럼 반동으로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윤이상은 마흔 살에 음악교사를 그만두고 프랑스에 유학했다가 독일로옮겨갔다. 부인 이수자 여사는 남편과 오 년을 떨어져 지내다 두 자식들보다 먼저 독일에 합류했고 어린 딸과 아들은 친척집에 맡겨져 십년 가까이 아버지를 만나지 못했다.

1960년대 초반 동독의 북한대사관에서는 유럽에 나와 있는 해외동포들과 유학생들에게 각종 책자며 선전물 등을 보냈고, 이는 폐쇄된 사회에 갇혀 있다가 너른 세상으로 나온 지식인들에게 깊은 관심과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윤이상은 지하철을 타고 몇 정거장만 가면 있는 동독의 북한대사관을 방문하게 된다. 비슷한 무렵에 프랑스 파리에 있던이응로 화백은 한국전쟁중에 월북한 아들을 만나게 해준다고 하여 북한을 방문했던 것으로 알려져 주위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윤이상은 서구 현대음악계에서 5대 작곡가의 한 사람으로 평가받았고이응로는 한국의 수묵화를 서양화에 접목시킨 대가로서 여러 비엔날레에 초청되고 전시된 화가였다.

잘 알려진 두 예술가 외에도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 가운데는 단순히 베를린에 와서 동독의 북한대사관을 방문한 이도있었고 개중에는 그들의 안내에 따라 북한을 방문한 이도 있었다. 지금도 국가보안법이 존재하는 한 조건은 마찬가지지만, 더구나 당시는전 세계가 둘로 갈라진 냉전시대였다. 그러나 서독 정부의 입장은 달라서 오히려 시민들이 동독 사람들과 접촉하고 교류하는 것을 권장했다고 한다. 교류를 꺼리는 것은 동독측이었지만 그들도 가족 친지 방문에 한해서는 언제든 사흘의 방문 기한을 허락하고 있었다. 외국인여행자들에게도 하루의 관광 여행이 허용되었을 정도였다.

사실 윤이상은 정치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나중에 탄압받고 한국의 정치 현실에 눈뜨면서 국내 민주화운동의 조력자가 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정치적으로 변화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방북 동기가 두가지 때문이었다고 늘 일관되게 주장해왔다. 하나는 그의 친구인, 전쟁 때 북으로 간 작곡가 김순남을 만나고 싶었다는 것이다. 김순남은누구인가? 김순남이 일본에 유학 가서 만난 스승이 일본 프롤레타리아 음악동맹의 서기장이었던 하라 타로였고, 그 만남은 식민지 조선의청년 예술가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는 해방공간에서 좌익진영의 문예운동에 치열하게 헌신하였으며 전통민요를 현대적으로 변형해 백여 곡의 대중적인 노래를 작곡했다. 가장 유명한 노래가 <빨치산의 노래>와 <인민항쟁가>였다. 김순남은 전쟁 직전에 월북한 뒤 모스크바 차이콥스키 음악원에서 체류했는데, 그가 작곡한 본격음악들은 <스파르타쿠스>로 유명한 하탸투랸과 쇼스타코비치의 격찬을 받았다. 특히 하탸투랸은 박헌영을 비롯한 남로당숙청과 함께 북한으로부터 김순남에게 소환 명령이 떨어졌을 때 그에게 망명을 권유했다고한다. 그러나 김순남은 이를 거부하고 귀국하여 숙청당했고, 이후 작곡활동이 금지된 채로 병고에 달리다 죽었다. 백남준을 비롯한 많은후배 예술가들이 그 천재 음악가를 흠모했다. 윤이상은 동갑이었던 김순남의 재능과 해방공간에서의 그의 전설적인 사회적 실천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서 그가 살아 있다면 북한에 가서 한 번만이라도 재회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물론 윤이상은 평양에 갔을 때 그를 만날 수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이름을 입 밖에 내는 것조차 금지되었다.

윤이상의 방북 이유 중 다른 하나는 고구려 벽화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보는 것이 소원이기 때문이었다. 그 무렵 일본의 어느 출판사에서만주와 북한에 있던 고구려 고분벽화를 선명한 컬러 사진집으로 출판했다. 윤이상은 서구의 현대음악이 과거의 형식적 틀을 해체하면서 동양의 음악과 자연스럽게 만난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는 우리 국악, 민속악, 무악, 5음계의 가락과 장단과 즉흥성을 도입해서 서양음악이 얻을 수 없던 새로운 세계를 확보해나갔다. 그가 고구려 벽화 사신도를사진으로 보면서 느꼈던 감동은 바로 마음속에 음률이 되어 떠올랐다.청룡, 백호, 주작, 현무라는 동물들은 세상의 동물들을 상상에 의한 베리에이션으로 재창조해냈고, 그것들을 묘사한 유연한 선들은 춤추고날아다니는 동작의 순간을 포착하고 있었다.

친구 김순남을 만나고 싶었고 우리 민족의 고대 벽화를 보고 싶었다는, 그래서 방북하기로 했다는 노예술가의 말을 나는 너무도 절절하게이해할 수 있었다. 해외여행이 자유로워진 뒤에 외형적으로 개방된 듯이 보이는 현재의 한국 사회와는 달리, 당시에 남한 사람은 섬처럼 분단된 반도의 남쪽에 갇혀 살아야 했고 외국에 체류하는 날부터 공황장애 비슷한 압박감에 시달려야했다. 그것은 외로움이나 향수 때문이 아니라 주체할 수 없는 이국땅의 자유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넘쳐나는자유는 그를 공간과 시간으로부터 소외시킨다. 더구나 지식인의 경우에는 이런 느낌 자체가 일종의 모멸감이나 패배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한반도를 의식 속에서 벗어나기로 하면서 거리마다 활보하는 유럽시민과 자신을 동일하다고 착각하게 된다. 그러므로 폐쇄된 반공국가의 한계 상황 따위는 우스갯소리처럼 잊어버린다. 따라서 사리 분별 있고 세상 물정을 아는 지식인이 조잡하고 빤한 북한 출판물을 보고는 가슴을 두근거리면서 경계를 넘어서게 된다. 북한을 몰래 방문했던 사람들은 온갖 죄명을 뒤집어쓰고 사형당하고, 북과 관련있는 사람을 만나기만 해도 십여 년 이상의 장기형을 받는 게 이 땅의 현실이었음에도말이다. 재일동포나 전쟁 때 부역의 혐의가 있는 사람의 가족들, 또는고기를 잡다가 자기도 모르게 어로한계선을 넘어가는 바람에 북에 억류되었다가 돌아온 어부들, 아니면 정치사회적 상황에 대한 불평을 술
취해서 떠벌리다 ‘막걸리 반공법’에 걸린 사람들 등등, 얼토당토않게조작되어 장기간 수형생활 끝에 근년에 와서 국가를 상대로 소송하여무죄판결을 받은 경우도 한둘이 아니다. 그나마 운이 좋은 경우지만 본인은 물론 온 가족이 고통받으며 잃어버린 세월은 보상받을 길이 없다.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은 독일에서 북한을 다녀온 어느 유학생이 귀국해서 자수하는 바람에 조직사건처럼 엮이게 된 것이었다. 한국의 요원들은 은밀한 내사를 통해 명단을 입수하고 나서 어떤 이는 약속장소에서 그대로 대사관으로 연행하고 또 어떤 이는 집을 방문해서 8·15광복절 정부 행사에 초청되었다고 속여서 동행 귀국했다. 당시 한국정부는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의 부정선거 후유증으로 야당과학생들의 시위가 계속되어 골머리를 앓던 터라 이 사건은 그야말로 때를 맞춘 호재였다. 사실 한국 정부가 타국에서 벌인 과감한 체포작전은 아무리 냉전대라 할지라도 유럽 시민사회의 상식으로 본다면 매우 무모한 행동이었다. 곧 독일과 프랑스 정부는 물론이고 전 유럽의시민사회가 격렬하게 반발했다. 유럽의 예술가와 지식인들은 항의와석방 운동에 기꺼이 동참했다. 사형과 무기징역 등의 중형을 선고받았던 윤이상, 이응로를 비롯한 서른네 명의 인사들은 몇 년씩의 형기를치르고 나서 그들이 체류했던 나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한국에 남은사람들은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들까지 연루되어 오랫동안 사실상 공민권을 제한받은 채로 군사독재시대를 살아가야 했고, 유럽으로 돌아간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반한 인사’로 낙인찍혀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쓸쓸히 이국땅에서 생을 마감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참으로 아이로니컬한 것은, 당시 사건을 지휘했던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 나중에 박정희 대통령과 불화하여 미국으로 망명한 뒤 자신이 반한 인사가 되어 군사정부의 내막을 폭로하는회고록을 써서 그 원고를 가지고 흥정하다가 살해되었다는 사실이다.신군부의 계엄령 시절, 박정희를 시해한 김재규의 부하들과 남한산성군감옥에 같이 수감되었던 민주화운동 활동가들 사이에서는 김형욱이파리에서 비밀리에 본국으로 납치되어 부마항쟁이 일어나던 무렵에죽었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사실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또한 당시에독일 현지에서 윤이상 등의 체포를 도왔던 장군 출신 대사 최덕신 역시 대통령과 불화하여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북한으로 가서 천도교 지도자로 식객처럼 머물다 사망했다. 이렇듯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망가지고 하잘것없이 버려졌다. 우리가 아는 몇몇 사람들의 운명을 잠깐살펴보더라도 얼마나 비극적인가? 이것이 지금도 숙명처럼 우리를 얽어맨 분단체제의 그물이다.

윤이상 선생은 나와 헤어지기 전에 다시 말했다. “나를 만나러 와주어서 고맙소. 누구든지 한국 사람이 나를 만나면 나중에 문책당하고 시끄러워져서 모두 전화도 못하고 안부만 전하고 가거든.”

“제가 베를린에서 선생님을 만나뵙지 못하고 그냥 지나갈 수는 없습니다. 한국에 돌아가면 친구들 보기가 부끄럽겠지요” 대답했더니 선생은 내게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해하지 말아요. 나는 민족적으로 . . . 북한을 좀 도와주려고 합니다. 그들이 창을 열고 세상 밖으로나와야 해요.”

나는 그것으로 그와의 만남은 끝난 줄 알았다. 남은 일정 동안은 한국과 독일 시민들이 모인 어느 사회단체에 가서 ‘광주’에 대한 강연을했다. 어느새 입수가 되었는지 광주항쟁을 기록한 책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복사본이 강연장 입구에 쌓여 있었다. 내 증언은독일어로 통역되었다. 앞에는 1980년 당시의 해외 특파원들이 찍은비디오 영상과 사진이 화면에 흐르고 있었다. 나는 마음먹은 대로 문학 얘기는 입에 담지도 않았다.

그 이튿날인가 윤이상 선생에게서 연락이 왔는데 베를린을 떠나기전에 점심이나 함께하자고 했다. 윤선생과 약속된 레스토랑에 나가보니 옆에 독일인 노부인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소설가 루이제 린저였다. 당시에 윤이상이 육십대 말이고 루이제 린저가 그보다 여섯 살 위였으니 그녀는 칠십대 중반의 나이였을 것이다. 호기심에 빛나는 두 눈은 장난꾸러기 같았고 굳게 다문 입과 도톰한 볼은 의지가 굳으면서도 완강한 고집을 지닌 인물로 보이게 했다. 물론 나는 독일 현대문학을 통해 그녀를 잘 알고 있었다. 이미 1960년대 초반에 그의 소설 『생의 한가운데』가 한국어로 번역되었다. 그 작품을 번역한 전혜린은 뮌헨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번역가와 에세이스트로 활약하다가 갓 서른을 넘긴 나이에 자살해서 이 소설을 더욱 유명하게 만들었다. 한국의 많은문학소녀들이 전혜린을 통해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를 읽고독문학과에 지원했다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루이제 린저의 삶은 그들이 생각한 것만큼 로맨틱하지는 않았다. 첫번째 결혼한 오케스트라 지휘자였던 남편은 러시아 전선에서 전사했고, 그녀는 나치에 저항하다투옥되었다. 현대음악 작곡가 카를 오르프가 그녀의 세번째 남편이었지만 이혼했다. 카를 오르프는 윤이상의 친구였고, 루이제 린저는 윤이상과 더불어 『상처 입은 용』이라는 대담집을 출판하기도 했다.

루이제 린저가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전 세계에 관심을 불러일으킨 김대중 납치와 김지하의 투옥 사건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1975년에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한국에 대한 그녀의 인상기는1980년에 북한을 방문하고 나서 쓴 기행문에 비하면 매우 고약한 것이었다. 아직도 한국의 극우보수측은 루이제 린저를 김일성과 북한의 앞잡이쯤으로 여기지만 그녀 역시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아니, 공산주의자이기는커녕 생태주의자로서 독일 녹색당의 대통령 후보로 추대되기도 했다. 한국인들에게는 불쾌한 기록으로 여겨지는 북한 방문기 『또하나의 조국』은 오랫동안 한국에선 출판되지 못하다가 나중에 출판된뒤에도 시장에서 사라져버려 연구자들 사이에서나 돌아다니게 되었는데, 나는 책을 읽지는 못했지만 연구자들이 발췌해놓은 부분들을 일별한 적은 있다.

그녀가 한국을 방문했을 무렵은 박정희가 1972년 종신집권체제인유신을 선포한 데 이어 1974년 긴급조치를 발령해서 이에 반대하는 학청학련 사건을 조작하여 시인 김지하 등에게 사형을 선고했다가 무기징역으로 감형했으며 대학에는 무기한 휴교령을 내렸고 인혁당 사건을 조작하여 관련자 여덟 명을 사형 집행했다. 전 세계는 이를 ‘사법살인’이라고 규탄했다. 언론 자유를 요구하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기자들을 해고하고 구속했다. 이때부터 많은 책들이 검열에 걸려 판금되었고 문학인들은 표현의 자유를 잃었다. 유신에 반대하는 문인들을 억압하기 위하여 당국은 ‘문인간첩단’ 사건을 날조했다. 내가 동료 문인들과 함께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조직했던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러니 그러한 때에 방한한 루이제 린저의 한국 인상기가 호의적일 리가없지 않은가. 루이제 린저는 당국에서 붙인 기관원을 따돌리고 많은재야인사들을 만났다. 특히 투옥된 김지하의 구명을 위해 시위에 참가하고 연행당하는 일이 일상이 되어버린 그의 어머니를 만났다. 정의구현사제단의 신부들을 만나고 양심적인 지식인들을 만났다. 그녀는 아마도 서울 중심가의 뒷골목에 버젓이 있었던 사창가와 그녀가 기생집으로 표현한 ‘방석집’이라고 하는 한복 입은 여자들이 나오는 술집도목격한 듯하다.

루이제 린저가 북한을 방문했던 1980년, 남한은 처참한 비극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루이제 린저와 한국은 참으로 운명적으로 악연이 될수밖에 없었다. ‘광주’는 세계의 언론인들뿐만 아니라 예술가들에게도충격과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특히 내란음모죄를 적용한 김대중의 구속과 사형 언도는 유럽의 정치인들까지도 들끓게 만들었다. 물론 루이제 린저가 북한에 대해 쓴 기행문은 곳곳에 편견이 보인다. 그것은 같은 유럽인인 앙드레 지드가 『소련 기행』을 썼던 것과는 다르다. 뒤에더욱 자세히 나오겠지만, 누군가 방북 소감을 물어볼 때마다 나는 거의 같은 말을 해왔다. ‘나는 감동했고 절망했다.’ 그리고 덧붙여 설명해야 했다. ‘폐허 속에서 자급자족할 터전을 일궈낸 북한 인민들의 생활력에 감동받았고, 북한 체제의 치밀한 통제에 절망했다.’

외국인인 루이제 린저에게는 국가보안법상 고무찬양죄가 적용되지 않으니 그녀는 객관성을 유지하려 했을 테고, 좋은 점과 나쁜 점을가려 보려고 노력한 것이 문맥에서 느껴진다. 당시까지만 해도 북한은 독재체제지만 초기의 사회적 이상주의의 잔재가 있던 때였고, 전문가들에 의하면 1970년대까지 사회복지 수준이라든가 경제지표가 남한보다 나았다. 그리고 그때는 아직세습독재가 이루어지기 전이었다.그래서인지 그녀는 북한의 사회통제에 대해 우리보다는 너그럽게 이해해주었고, 북한 인민이 서방세계의 시민들과 같은 개인적 자유를 누릴 필요는 없다는 유럽적 편견을 유지한 듯하다. 그 예로 그녀는 서구사회에 만연한 범죄, 마약, 성 문란, 퇴폐적 상업주의 문화 등을 거론하면서 북한 사회를 도덕적이고 청결한 사회로 평가했고, 독재까지유교의 영향으로 이해했다. 다만 예술 분야의 상투성과 획일주의에 대해서는 날카롭게 비판했다. 그녀는 북한의 교화소나 수용소의 존재에대해서 끊임없는 의구심을 가졌지만 중립적인 태도를 취했다. 이 모든 생각은 나도 나중에 경험하게 되는 일이었다. 어쨌든 루이제 린저는 유럽의 지식인이었고 여성이었으며 반인간적 참화를 겪은 전쟁 세대로서, ‘이만큼이라도 해냈으니 대견하다’는 너그러움이 북한 사회를보는 그녀의 시선 전체를 관통하고 있었다. 그녀는 윤선생에게서 들었다면서 광주항쟁의 기록에 대해 물었고, 나는 광주를 알리기 위해 많은 이들과 함께 준비하던 과정에 대해 짤막하게 말해주었다. 그녀는내게 곧 귀국할 예정인가 물었고 나는 아무런 계획이 없었으므로 그렇다고 대답했다. 루이제 린저는 망명할 생각은 없느냐고도 물었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모국어가 있는 곳에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이 말처럼 막연하고 순진한 말이 없다는 것을 오랜 뒤에야 나는깨달았다. 윤이상 선생이 독일어로 통역을 해주었는데 루이제 린저는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쾌활한 목소리가 되면서 말했다. “어쨌든 해외에서 지내려면 독일어든 영어든 좀 배워야겠어요.”

그후 나는 그녀를 1990년 제1차 범민족대회 때 백두산 정상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그때만 해도 내가 꿈꾸는 것과는 달리 세계가 더욱 나쁘게 변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제국주의적 욕망이 은폐된 참혹한 내전과 사상적 종교적 갈등으로 인해 과거의 참화보다 더욱광범위하고 무차별적인 살상의 시대가 우리 앞에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