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이제니

거실의 모든 것

거실에는 책상이 있다. 거실에는 의자가 있다. 거실에는 책이 있고. 꽃이 있고. 거울이 있고. 종이가 있고. 유리가 있고. 서랍이 있고. 약속이 있고. 한숨이 있다. 한편에는 식탁이. 한편에는 냉장고가. 냉장고 안에는 사과가. 사과 안에는 과육이. 과육 안에는 씨앗이. 씨앗 안에는 어둠이. 어둠 안에는 기억이. 기억 안에는 숨결이. 숨결 안에는 눈물이. 눈물 안에는 너의 말이. 너의 말 안에는 나의 말이. 나의 말 안에는 지나간 흔적이 있다. 우리의 감정이라 부르던 어떤 것. 우리의 취향이라 부르던 모든 것. 일일이 나열하지 않아도 되었던 모든 것.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되었던 어떤 것. 거실에는 어떤 모든 것이 있다. 어떤 모든 것 안의 어떤 모든 것. 모든 어떤 것 안의 모든 어떤 것. 기울어진 모서리. 희미한 벽지. 벽지에 닿는 손가락이. 손가락을 따라가는 눈길이. 이제는 없는 너의 눈길이. 되돌릴 수 없는 어떤 얼룩이.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번지는 모든 얼룩이. 거실에는 모든 어떤 것이 있다. 있다. 있다. 있다. 모든 어떤 것 안의 어떤 모든 것. 어떤 모든 것 안의 모든 어떤 것. 우리를 다른 우리로부터 구별되게 하던 모든 어떤 것. 우리를 다른 우리로 번지게 하던 어떤 모든 것. 거실에는 문이 있다. 거실에는 창이 있다. 거실에는 모자가 있고. 연필이 있고. 온기가 있고. 선반이 있고. 후회가 있고. 흔들림이 있고. 망설임이 있고. 독백이 있고. 양초가 있고. 구름이 있고. 한낮이 있고. 한탄이 있고. 나무가 있고. 풀이 있고. 물이 있고. 불이 있고. 웃음이 있고. 울음이 있고. 음악이 있고. 침묵이 있고. 그림자가 있고. 고양이가 있고. 개가 있고. 새가 있고. 내가 있고. 네가 있고. 이제는 없는 네가 있고. 이제는 없는 오늘의 네가 있고. 거실에는 어떤 모든 것이 있다. 있다. 있다. 있다. 모든 것 안의 어떤 것. 모든 것 안의 모든 것. 어떤 것 안의 어떤 것. 어떤 것 안의 모든 것. 거실에는 어떤 것이 있다. 있다. 있다. 있다. 거실에는 모든 것이 있다. 있다. 있다. 있다.




달과 돌

비 오는 밤바다에 간다. 밤. 바다. 비. 너는 발아래 돌 하나를 주워 물 위로 던진다. 얼마나 깊은지 보려고. 돌은 오래오래 긴긴 소리를 내며 천천히 천천히 가라앉는다.
 
돌아보는 사이 다시 떠오르는 돌

너는 쓴다. 손가락에 물을 묻혀 쓴다. 몇 줄의 문장을. 몇 줄의 진실을. 몇 줄의 거짓을. 거짓 속의 진실을. 진실 속의 환각을. 환각 속의 망각을. 망각 속의 과거를. 과거 속의 현재를. 현재 속의 미래를. 미래 속의 우연을. 우연 속의 필연을. 필연 속의 환멸을. 환멸 속의 울음을. 울음 속의 음울을. 음울 속의 구름을. 구름 속의 얼굴을. 얼굴 속의 어둠을. 어둠 속의 문장을. 다시 몇 줄의 문장을. 다시 몇 줄의 희미한 문장을.

돌아보는 사이 다시 가라앉는 돌

돌과 돌은 멀다. 달과 달은 멀다. 물과 물은 멀다. 말과 말은 멀다. 말과 물은 멀다. 물과 돌은 멀다. 돌과 달은 멀다. 달과 말은 멀다. 달과 달이라는 말은 멀다. 돌과 돌이라는 말은 멀다. 물과 물이라는 말은 멀다. 말과 말이라는 말은 멀다.

멀어지는 사이 다시 떠오르는 말 
달아나는 사이 다시 사라지는 달

휘발되는 얼굴 위로 희디흰 가루가 날린다 
날리고 흩어지던 어느 날의 고운 뼛가루처럼

곳곳에서 동시에 미끄러지는 
보이는 보이지 않는

달 아래 흐르는 돌 
물 아래 번지는 달




구름과 개

이제는 없는 개
사라지고 없는 개

어느 날 개는 하품을 하였다
하품 너머로 구름이 흐르고 있었다

말 대신 하품으로
하품 대신 구름으로
 
구름은 점점이 흩어지고 있었다
오래전 무언가를 닮아가고 있었다

모든 것이 이미 늦었다고 생각했다
들려줄 말이 떠올랐지만 돌려줄 곳이 없었다
돌이킬 수 없는 얼굴로 벽을 마주 보고 섰다

나는 내 개다
내 개는 나의 거울이다

나는 웃었다
언젠가 웃었던 개

나는 울었다
언젠가 울었던 개

나는 나로 남겨졌구나
개는 개로 완성되었구나

시간이 흐르자 벽이 열리기 시작했다
뒤늦은 인사가 구름으로 흘러가는구나

내 개는 내 입으로 말을 했다
나는 나 자신으로 한 겹 물러났다

이제 개는 없고 나는 다시 하품을 하였다
한낮의 허공 속에 둥실 떠서 구름이 되었다




나선의 감각
—검은 양이 있다

검은 양이 하얀 양을 부른다. 하얀 양이 검은 양을 부른다. 아이들은 붉은 풍선 속에 누워 있다. 검은 천이 푸른 하늘에서 내려온다. 내 마음에는 검은 양이 하나 있다. 검은 양이 하나. 검은 양이 하나 있다. 검은 양이 검은 개를 부른다. 검은 개가 하얀 말을 부른다. 아이들은 노란 수수를 쥐고 있다. 금붕어는 초록 수초를 먹고 있다. 그날의 얼굴은 붉지도 검지도 않았다. 물속의 공기 방울에게 거짓 맹세를 했다. 더 이상 어제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아침은 어제보다 조금 늦게 왔다. 금붕어는 죽고 없었다. 아름다운 날들이구나. 나무를 떠난 자두만큼 아름답구나. 은색의 종이가 펄럭인다. 연필을 함부로 낭비했다. 지우개는 조금 아꼈다. 검은 깃발이 하얀 노래를 부른다. 하얀 노래가 검은 새를 부른다. 정오의 꽃이 시들고 있었다. 비행기는 왼편으로 날고 있었다. 회전하는 것들은 날개가 없었다. 잃어버린 것들이 휘돌고 있었다. 꼬리는 붉고 검고 짧았다. 울적한 얼굴이 하나 있었다. 얼굴이 하나. 얼굴이 하나 있었다.




빛으로 걸어가 빛이 되었다

주문을 외우듯 눈을 감으면
철 지난 바닷가에 서 있는 오래전 사람

소녀와 소녀가 손을 잡고 있었다
뒷모습을 뒷모습으로 보이며 서 있었다

손은 푸르렀고 해는 뜨거웠다
구름은 흐르고 모래는 흩어졌다

바다는 바다로 멀어지고 있었다
두 눈 가득 아프게 차오르고 있었다

도망치지 않고 그 자리에 서서
두 눈으로 물빛을 마주 보고 서서

눈을 멀게 하는 것이 언제나 좋았다
시라는 것은 이제 그만 잊어도 좋았다

손과 손을 맞잡고 있다는 것
담장을 타오르는 덩굴풀을 본다는 것

보고서도 보지 못한 나무들이 일어설 때
거리는 문득 길어지고 하루는 무수한 날들로 이어지고

달려오는 말 다가오는 손
물결이 왔다 물결이 갔다

보이지 않는 빛 속에서
빛으로 걸어가 빛이 될 때까지

거울이 거울로 깨어졌다
물방울은 물방울로 떨어졌다

무언가 저 너머로 날아올랐다
새는 비로소 새로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