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편의 시

Moon Chung-hee

우리 순임이

일찍이 농촌을 떠나와
그때 막 시작된 산업화 시대의 여직공이 되어 밤낮으로 수출 공장에서 일을 했던
우리 순임이
그녀의 거북 등같이 주름진 손을 오늘 저녁 TV에서 보았다
초로의 할머니가 되어 마을 회관에서
동네 노인들과 복분자 술을 나눠 마시고 있었다 동남아 며느리가 낳은
눈이 약간 검은 손자를 자애로이 품에 안고 글로벌 시대, 뭐 그런 이름은 굳이 몰라도 좋지만 넉넉하고 따스하게 다문화 가족을 이루며 그때처럼 국제화 시대를 먼저 살고 있었다
내가 대학을 나오고
세계 문학을 기웃거리며 흰 손으로 시를 쓰는 동안



토불 土佛

잘 가요 내 사랑
나는 진흙 속에 남겠어요
나무와 나뭇잎이 헤어지듯
그렇게 가벼운 이별은 없나 보아요
당신 보내고 하늘과 땅의 가시를 홀로 뽑아내요 끝까지 함께 건널 줄 알았는데
바람이 휘두르는 칼날에 그만 스러집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조차 때로 집어등 ( 集魚燈) 처럼 사람을 가두고 눈멀게 하네요
나 모르는 것을 숨기고 있다가
진흙탕, 가장 깊은 진흙탕에 넘어뜨리네요
더 이상 갈 곳 없어 광활한 심연
꽃도 죄도 거기 녹이며
검은 씨앗으로 나 오래 어둡겠어요
당신이 또 다른 이름이 되어 가는 동안
홀로의 등불을 홀로 끄고 켜는
작은 토불 되어 뒹굴겠어요



뱅갈의 밤

네거리 신호 앞에 차가 멈추자
아이 업은 여자가 조르르 다가온다
배고픈 아이의 입을 손으로 가리키며 구걸의 언어를 차창 속으로 쏟아 놓는다 자동인형처럼 아이가 싸리버섯 손을
차창 속으로 들이민다
황급히 지갑을 꺼내 10루피를 찾는다 그사이 신호는 바뀌고 차는 출발하고 만다 지갑 속에 수북한 100루피 속에
쉽게 안 보인 10루피 한 장
우욱! 호텔에 돌아와 헤아려 보니 100루피라 해도 3600원이다
밤 깊도록 내가 나를 바늘로 찔러 본다 살은 아프고 피는 따스한가
야박하고 이악스런 절약의 습관을 찔러 내가 살찐 거지임을 확인한다
그 많은 교실에서 배운 수와 셈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앙상한 손, 좁쌀 같은 언어만 쪼다가 말라버린 우물
별 하나 내려오지 않는 폐허를
벵갈의 긴밤을
좀벌레가 되어 기어다닌다



공항 가는 길

검푸른 수염에 터번 쓴 택시 운전수에게 공항으로 가자고 말한 후
창밖 아열대 몬순을 바라보았다
고향에 돌아가면 은자(隱者)가 되리라 여독으로 입술이 많이 얇아진 것 같다 도심을 질주하는 소 떼를 피해
택시는 달리다기
갑자기 붉은 성 앞에 바퀴를 세운다 “당신은 지금 한 성자가 태어난 시간에 아름다운 저 지평선을 보고 있소
이젠 더 이상 지상에서는 헤맬 곳이 없소” 운전수는 스스로 감격한 듯
한참이나 먼 곳을 바라보더니
순간에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다
시인이 우글거리는 땅이다
보석 속에서 무덤이 떠오른 무굴제국에 나는 다시 갇힌 것인가
타고 남은 인골(人骨)속에서
무상을 고르듯
나는 맨손으로 다시 무엇을 골라야 할까 이 생에 못 가면
내생에 돌아갈 수 있겠지
비행기가 멀리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시인의 침대, 문정희

시인의 침대는 에트나 산*에 놓여 있다
절벽 끝의 화산! 굳이 고독 끝의 분화구라고 말하지
는 않겠다
그는 침대에 누운 채 산 아래를 본다
오직 앞을 향하여 두 발로만 걷는 사람들을 본다
모두 죽은 사람들로 보인다
왜 뱀처럼 온몸으로 기어가지 않을까
허공을 걸어온 저녁의 새처럼
두발을 깃털 속에 넣고
생(生)을 작고 동그란 돌멩이처럼 만들어

쩡쩡 내던지지 않을까
자장 화려하고 뜨거운 안감을 댄 잿빛 수건 같은
심심함을 선물로 받은
시인의 침대는 에트나 산에 놓여 있다
잿빛 수건 안감의 아라베스크 무늬 속에 꿈꾼다



소금꽃, 문정희 

많은 바다를 건넜지만
눈물을 다 건너지는 못했다

나는 모르겠다
왜 바다의 밑바닥은 늘 모래인지
왜 흐름이 전부인지
길은 파도로 넘치고
싱싱한 가변의 꽃들 철마다 피어나는지
바닷새들은 불안한 울음을 끼룩끼룩 토해내는지

만약 나의 시에게
대답을 하라고 했다면
나는 아마도 시를 버렸을 것이다

나는 모르겠다
나는 아직도 눈물을 건너고 있다
눈물이 마르면 눈부시게 하얀 소금꽃이 필 것이다



낙타초, 문정희

사막에 핀 가시
낙타초를 씹는다
낙타처럼 사막을 목구녕 속으로 밀어 넣고
솟구치는 침묵을 심장에다 구겨 넣는다
마른 땅 물 한 모금을 찾아 천길 뻗친 뿌리가
사투 끝에 하늘로 치솟아
허공의 극점을 찌르는
비장한 최후
뜨거운 모래를 걷는 날카로운 맨발로
어둠 속 별 떨기 같은 독침을 씹는다
새처럼 허공을 걷지 못해
제 혀에서 솟은 피
제 목에서 흐르는 선혈로 절명을 잇는
나는 사막의 시인이다



쇠의자, 문정희


쇠의자에 등뼈를 세우고 앉아
밥을 먹는다
밥이라는 말처럼 슬프고 기쁜 말이 있을까
밥? 밥 먹고 산다는 말을 먹는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밥 한 숟갈의 뭉클함
밥알 한알한알의 그리움을 먹는다

창밖 가시나무에 안은 새! 너 가지 마라
나와 함께 밥을 먹자꾸나
쇠의자에 등뼈를 세우고 앉아
울컥울컥 새소리를 쪼아 먹는다
수인 (囚人)처럼
내가 내 몸을 뜯어 먹는다
눈물 몇 방울을 후식으로 먹는다



딸의 소식, 문정희

낙랑에는 적이 쳐들어오면 저절로 우는 자명고라는 레이더가 있었다. 나랑의 왕 최리의 딸은 북국 대무신왕 (大武神王)의 아들 호동을 사랑하여 북을 찢었고, 호동은 낙랑을 쳐들어왔다. (“삼국사기” 제14권)

아버지, 저 여기 살아 있어요
그날 제 품에 숨긴 칼로 낙랑의 북을 찢을 때
제가 찢은 것은
제가 오면 저절로 운다는 자명고가 아니었어요
제 운명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손으로 아버지의 나라를 찢었습니다
지금도 그 순간이 선명합니다
두려움과 죄의식으로 후들거리며
맹목 속에 온몸을 던진
저는 그때 미친 바람이었어요
호동은 달처럼 수려한 사내
제 사랑은 전쟁의 아찔한 절벽에 핀 꽃, 세상에
파멸밖에 보여줄 수 없는 사랑이 있다니요
하지만 북을 찢고 제가 따른 건 호동이 아니었습니다
검은 보자기 홀로 뒤집어쓰고
손에 쥔 칼 높이 들어 북을 찢을 때
하늘의 별들 우르르 떨던
그 캄캄한 절망만이
온전히 제 것이었습니다



나무 학교, 문정희 

나이에 관한 한 나무에게 배우기로 했다
해마다 어김없이 늘어가는 나이
너무 쉬운 더하기는 그만두고
나무처럼 속에다 새기기로 했다
늘 푸른 나무 사이를 걷다가
문득 가지 하나가 어깨를 건드릴 때
가을이 슬쩍 노란 손을 얹어놓을 때
사랑한다! 는 그의 목소리가 심장에 꽂힐 때
오래된 사원 뒤뜰에서
읏어요! 하며 숲을 배경으로
순간을 새기고 있을 때
나무는 나이를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도 어른이며
아직 어려도 그대로 푸르른 희망
나이에 과한 한 나무에게 배우기로 했다
그냥 속에다 새기기로 했다
무엇보다 내년에 더욱 울창해지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