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피린

박민규

Artwork by Lee Wan Xiang

그날 점심엔 라면을 먹었다.

메밀국수를 먹자고 곽(郭)과 황보(皇甫)가 말했지만, 라면이 먹고 싶었다. 둘은 메밀국수를, 나는 라면을, 디자이너인 라이는 아무튼 전철역 쪽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어디 가? 응, 아무튼. 라이의 대답이 <응, 아무튼>이었으므로 아무튼 나도 혼자 라면을 먹었다.

말하자면 그게 전부다. 점심시간, 간단한 식사, 스타벅스, 에스프레소.

창가 쪽 테이블에서 아이디어 스케치를 한 것도 여전했고, 곽과 황보의 합류도 여전했으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 것도 전한 날이었다. 평소와 다른 일이 한 가지 있긴 했다. 캐러멜 마키아토? 오늘은 저걸 마실까 해. 말하자면 곽이 캐러멜 마키아토란 걸 들고 왔다. 어떤 맛이야? 글쎄, 굳이 말한다면 이름과 비슷한 느낌이랄까. 캐러멜 마키아토라고, 그래서 두어 번 나도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그게 전부였다.

라이의 문자를 받은 건 스타벅스를 나올 무렵이었다. 삼십분 늦어짐. 삼십분 늦겠다는데? 회의가 두시부터잖아? 라이 녀석 언제나 제멋대로라니까. 아마도 그런 말을, 곽이나 황보와 나누며 회사를 향해 걷고 있었다. 회의, 회의, 회의, 회의. 회의로 꽉 찬 오후도 다를 바 없었고, 제멋대로인 라이도 여전했으며, 엇비슷한 사람들의 뒷모습과 엇비슷한 포플러들의 녹음(綠陰), 반짝임, 풍광, 흔들림.

저게 뭐지?

그리고 그것을 보았다. 어어 . . . 뭐냐구. 곽이나 황보 중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순간 귀가 멍할 정도의 <붐>을 온몸으로 느꼈다. 점심을 끝낸 사람들로 광장은 붐볐는데, 한순간 모두가 그런 신음을 발했기 때문이었다. 더할 나위 없이 푸른, 5월의, 마치 윈도우즈의 바탕화면과도 같은 완벽한 하늘 위에 그것은 떠 있었다.

그것을

뭐라고 해야 할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납작한 원통 같은 형태였고, 분명 윤곽이 뚜렷한 물질이었다. 티 없이 깨끗한 순백의 색채지만 구름과는 분명 다른 느낌이었다. 뭐랄까, 보다 단단하고 확고하다, 그리고 거대했다. 하지만 누구도 그것을 UFO라고 느끼지 않았다. 금속보다는 확실히 부드러워 보였지만, 단지 그것이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다. 설명하긴 힘들지만, 그것은 분명 UFO와 정서(情緖)가 다른 어떤 <것>이었다.

하늘에 떠 있는 게 저 정도면 직경이 대체 얼마란 얘기야? 콧수염을 매만지며 황보가 중얼거렸다. 그러게. 어쨌거나 어떤 역사적 사건이 아닐까? 우선 폰카로 그것을 촬영한 후, 나는 열심히 문자를 전송했다. 우리가 일빠겠지? 곽과 황보도 특종을 낚아챈 기자처럼 열심히 문자를 전송했다. 뭔지 몰라도 아무튼, 그리고 돌아가며 그것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했다. 생각보다, 사진은 잘 나온 편이었다.

당연히 난리가 났다. 곧장 사무실로 올라왔지만 세상의 붐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전화에, 메신저에, 뉴스에 . . . 거리는 물론, 건물의 창마다 그것을 보러 몰려든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방수방화 시멘트벽 같은 느낌의 부장조차도, 자신의 데스크에서 골똘히 뉴스를 보고 있었다. 양치를 마치고 오자 휴대폰엔 무려 열여섯 통의 문자가 들어와 있었다. 나는 곧 스물한 통의 문자를 전송했다.

그리고 곧 회의가 시작되었다. 대피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냐? 곽이 속삭였지만 부장의 주재로 어김없이 회의는 진행되었다. 말하자면, 이상한 분위기였다. 버젓이 창밖에 그것이 떠 있는데도 누구 하나 언급을 하지 않았다. 여느 때처럼 각자 아이디어를 발표하고, 토론하고, 논쟁을 벌이고는, 했다. 황보의 발표가 이어졌다. 그러므로 제가 잡은 컨셉은 프리미엄입니다. 대한민국을 이끄는 이 퍼센트, 당신을 위한 요실금팬티 . . . 하는데

커다란 소음을 내며 수십대의 헬기가 창밖에 나타났다. 누구라도, 그래서 모두가 바깥을 쳐다보았다. 공중에 뜬—딱 봐도 수 킬로 지름은 돼 보이는 거대한 물질—그 주위를 맴도는 수십대의 헬기. 발표를 하던 황보도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자자, 동요하지 말고 . . . 어떤 발표가 있겠지. 회의를 정리한 것은 부장이었다.

사무실은 칠십일층이다. 미국에 본사를 둔 외국 계열의 광고회사다. 칠십층과 칠십일층을 함께 쓰는데 위층에 우리 부서가 있다. 칠십일층의 전망이란 결코 평범한 것이 아니다. 네시에 또다른 회의가 있었지만, 그래서 도무지 생각을 정리할 수 없었다. 뭐란 말인가, 저것은. 보면 볼수록 은근히 신경이 쓰이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미, 사무실에서 보이는 하늘의 절반 정도를 장악하고 있었다. 은근히 희고, 눈부셨다.

세시쯤 장관의 긴급발표가 있었다. 브리핑을 통한 장광설의 요지는—아직 저 물질의 정체는 파악되지 않았다, 생체반응이나 금속반응은 없다, 방사능도 검출되지 않았다, 어쨌거나 지속적인 탐사를 통해 정부는 신중히 대처해나갈 것이다, 였다. 한 시민이 제보한 동영상엔 출현 순간이 포착되어 있었다. 그것은 맑은 하늘 속에서 갑자기 나타났다. 어떤 이동도 없이, 현재의 그 위치에 문득 실체를 드러낸 것이었다. 사오초 은근히 드러난 윤곽이 확고한 결정으로 굳어진 건 한순간의 일이었다. 맞아, 바로 저랬다니까. 기지개를 켜며 황보가 말했다. 평소라면 업무를 다그쳤을 부장도 팔짱을 낀 채 모니터를 응시할 뿐이었다. 저러다 <붐> 하고 광선을 쏘는 거 아닐까? 영화에서 종종 보잖아 그런 광경 . . . 곽이 큰 소리로 떠들었다. 광선이라니

지식인의 수치다.

달에 착륙하던 때 같군. 부장이 중얼거렸다. 직접 보셨습니까? 아니, 유튜브에서. 헬기에 매달린 요원이 그것의 표면 위로 조심조심 발을 내렸다. 모두가 긴장했는데 그리고 성큼, 두 발을 올려놓았다. 추후 일어날 상황이 더욱 궁금했지만, 열심히 수신호를 보내는 모습을 끝으로 뉴스 속보는 막을 내렸다. 어쩐지 아쉬웠지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가운데 회의가 열리고 일, 일, 일, 일. 다시 회의, 회의, 회의, 회의.

늘 일이 많다. 일을 하다보면, 그래서 그날밤까지, 창밖의 그것에 대해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이미 밤, 열시였다. 야근을 한 날은 대개 맥주를 마셔왔다. 오래전부터 굳어진 습관이다. 어때, 라고 서로 묻지 않아도 분수대 코너의 호프는 이미 예약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마찬가진데도, 건물을 나선 순간 모두가 멈칫했다. 그<것> 때문이었다. 낮과는 다른 느낌의 그것이, 여전히 밤하늘을 점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은근히

무서웠다.

입을 연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누구도 호프로 향하지 않았다. 각자, 그래서 말없이 손을 흔들고 헤어졌다. 나는 다시 건물로 들어갔다. 지하 칠층의 주차장, 지하 이층의 차단기와 게이트, 사 킬로가량의 팔차선 도로, 두 개의 터널과 고가도로, 그리고 내내 떠 있는 . . . 저<것>. 오피스텔에 돌아와서도 조명을 켤 기분이 아니었다. 어둠속에서 샤워를 하고 털썩, 침대에 걸터앉아 맥주를 마셨다. 칠 킬로미터나 벗어났는데도 그것은 전혀 작아진 느낌이 들지 않았다. 추락해온 달처럼 거대했고, 은근히, 언제라도 결국 연약한 지상을 덮쳐버릴 것만 같았다. 도대체 뭐냔 말이다, 이 시추에이션은. 서랍을 뒤져 나는 비타민을 몇알 꺼내 삼켰다. 추락하지 않은 달만이 가까스로 스스로의 운행을 유지하고 있었다. 더듬더듬 나는 노트북의 폴더를 열었다. 메신저 속에서 곽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까 맥주라도 할 걸 그랬나?
아, 맥주라면 지금 마시고 있어.
거기서도 보여?
당연하지.
뉴스 봤냐?
아니.
직경이 십 킬로래.
오 예.
나 참, 무슨 이런 일이 다 있냐? 지구 종말도 아니고.
뉴스에선 뭐래?
뚜렷한 발표는 아직 없어.
하긴 뭐.

심야가 되면서 슬슬 자연현상이니 뭐니 말들은 많아.

하긴 뭐.

외신도 아주 난리던데, 한국 . . . 단박에 세계의 이슈 톱 랭큽니다.

하긴 뭐.

그나저나 회사 말이야, 뭔가 조치가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

하긴 뭐.

다음날 아침엔 도심 일부가 재해구역으로 지정되었다는 발표가 있었다. 하긴 뭐, TV를 보며 나는 중얼거렸다. 회사는 당연히 그 범주에 속해 있었다. 토스트와 베이컨, 우유와 샐러드. 어제와 다름없는 메뉴였지만, 분명 어제와는 다른 아침이었다. 우유를 마시며 나는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았다. 아침의 풍경 속에 여전히 그것은 떠 있었고, 뭐랄까, 어제에 비해 조금은 더

자연스러웠다. 어쩔 수 없겠군, 자리잡은 새로운 <현실> 앞에서 베이컨을 씹으며 나는 생각했다. 이상하게도 전날밤 같은 두려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것이 지식인의 힘이란 걸까? 아니면 나란 인간 . . . 은근히 희고 눈부신 것에 쉽게 마음을 여는 스타일일까? 어쨌거나 빨리 적응을 마쳐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다. 얼마 남지 않은 피티(경쟁 프레젠테이션)를 생각하면 더더욱 그랬다. 식사는 십분 만에 끝이 났다.

도심 곳곳에 군경이 배치된 것을 제외하고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일상이었다. 러시아워, 라디오의 시사뉴스, 레드, 그린, 레드, 그린 점멸하는 신호등. 하긴 뭐, 애매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도심의 출입을 금한다면 경제가 마비될 것이고, 게다가 아직은 어떤 재해도 일어나지 않았다. 경제는 중요하고, 다만 이상한 물체가 공중에 떠 있을 뿐이다. 레드, 그린, 레드, 그린, 정부로서도 여간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겠지. 하긴 뭐, 하고 나는 중얼거렸다. 그래도 그렇지

결근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은근히, 다들 희고 눈부신 것에 쉽게 마음을 여는 스타일일까? 오전 내내 중역회의가 열렸으므로 우리야 뭐, 모처럼 한가한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일을 하거나, 뉴스를 검색하거나, 삼삼오오 잡담이 곳곳에서 이어졌다. 그<것>의 윗면을 향해 여러 대의 헬기들이 장비를 실어나르고 있었다. 뭘 하려는 걸까? 우리야 알 수 없지. 요실금팬티의 런칭에 관한 프리마케팅 자료, 를 덮으며 곽이 중얼거렸다. 커피나 한잔하지. 우리는 스타벅스로 내려갔다.

스타벅스는 여전히 사람들로 들끓었다. 재해구역이라곤 도무지 말할 수 없겠는걸. 그러게. 그보다는 재해의 성격도 어딘가 모르게 달라진 게 아닐까? 즉 현대에 이르러 말이야. 우선 자리를 잡고 앉아 우리는 재해에 관한 얘기를 나누었다. 전쟁이나 홍수 . . . 그런 걸 겪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않잖아. 그러게. 그러고 보니 꽤나 옛날 말이군, 전쟁이나 홍수라 . . . 그러니까, 이제 재해란 건 . . . 이런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앉아 커피를 마시는 . . . 뭐 그런 걸까? 묘한 기분이 들었다. 불안해. 라이가 중얼거렸다. 불안해, 라고 라이가 중얼거렸으므로 은근히, 습관처럼 다들 불안해져버렸다. 그러고 보니 휴 . . . 이런 일이 있는데도 여기 앉아 커피를 마신다—라니, 창밖을 바라보며 황보는 인상을 찡그렸다. 주문부터 하자. 곽이 말했다.

무슨 주문(呪文)처럼, 주문을 하고 나자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편해졌다. 난 또 캐러멜 마키아토 마실래. 웃으며 곽이 커피를 들고 왔다. 캐러멜 마키아토, 캐러멜 마키아토 하면서—그래서 우리는 커피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말하자면 원두의 원산지에 대해, 또 파스타와 아이스크림, 스시에 대해. 그리고 어쩌다

<김치볶음밥을 맛있게 만드는 법>에 대해 논쟁을 벌였다. 말 그대로, 어쩌다 벌어진 논쟁이었다. 곽은 인도 카레를 가미한 후 산초로 향을 내는 조리법을, 황보는 밥을 볶을 때 으깬 땅콩가루를 고루 뿌려준다는 주장을, 라이는 중국 허난성산(産) 고추기름의 효용을, 나는 발매된 지 이십칠일이 지난 종가집김치를 물로 씻어 볶았을 때의 그 맛을, 내내 고집했다. 그게 더 맛있다니까. 결국 충돌이 일어 라이와 나는 얼굴을 붉혔다. 올라가자. 언쟁을 중재한 것은 곽이었다. 여전히, 그런데 문득

그것이 떠 있었다.

초여름의 창공을 올려보며, 그래서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밥을 볶는 방법은 달라도 그 순간의 감정만큼은 서로가 비슷했다. 말하자면—도대체, 지금, 뭘, 하고, 있는 건가, 말이다. 엇비슷한, 광장을 오가는 와이셔츠들 속에서, 포플러들의 녹음, 반짝임, 풍광, 흔들림 속에서 나는 생각했다. 도대체, 지금, 뭘, 하고, 있는 건가, 라고.

지식인답게, 점심을 먹으며 나는 라이에게 사과를 했다. 아니 뭐, 얼굴을 붉히며 라이도 사과를 받아주었다. 미안해, 나 실은 호올스 때문에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거든. 호올스 때문에? 실은 어제 점심때 내가 삼십분 늦겠다고 했잖아. 그게 호올스를 사러 갔던 거거든. 나 호올스 마니아란 거 알지? 뭐 . . . 몰랐다. 하지만 종종 라이가 건네주는 화~한 캔디가 호올스란 건 알고 있다. 어쨌거나 라이는 말을 이어갔다. 멘토립스터나 아이스블루, 허니레몬 같은 건 흔해. 그런데 그저께 바이타 씨 어소티드, 바이타 씨 오렌지란 게 있다는 걸 알았지 뭐야. 바이타 씨 어소티드, 바이타 씨 오렌지라니! 당장 정보를 얻어 그걸 판다는 동네까지 갔던 거야. 그리고 겨우 바이타 씨 오렌지를 구했지, 그런데 글쎄 어소티드가 품절인 거야. 망할 어소티드, 그다지 대중적인 느낌의 이름도 아닌데 말이야. 근처 가게를 몇군데 더 돌았지만 역시나였어. 물론 바이타 씨 오렌지도 기대 이상이었지만 . . . 어소티드는 또 어떨까, 어소티드는 과연 . . . 하다가 저걸 보게 된 거야. 나, 너무 놀라서 오분 정도 꼼짝 않고 . . . 아니, 실은 움직일 수 없었던 거지. 그리고 뭔가 잔뜩 좌절해 있다가 . . . 그런 생각이 들었던 거야. 어떤 생각?

호올스라니

라고 말이야. 호올스라니? 그래, 호올스라니! 그냥 갑자기 그런 기분에 사로잡혀버린 거야. 저런 게 떠 있는데, 도대체 나란 인간은 . . . 아무튼 그래서 호올스라니! 가 돼버린 거지. 실은 그래서 내내 저기압이 이어진 거야. 이해해,라고 나는 말했다. 정말? 그건 마치 . . . 김치볶음밥이라니! 와 같은 거잖아.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마워 . . . 톡톡, 그리고 라이는 주머니에서 꺼낸 호올스를 우리에게 나눠주었다. 강력한 휘산(揮散) 작용의, 호올스였다.

불쾌합니다.

휴게실에서 마주친 부장에게 나는 말했다. 뭐가? 부장은 녹차를 마시고 있었고, 물끄러미 창밖의 그<것>을 보고 있었다. 그래서 불쾌한 것입니다. 여차저차, 그간의 일들을 나는 늘어놓았다. 해서 우울해지는 것입니다. 설명하긴 힘들지만, 그냥 저런 게 떠 있으니까요.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있는데 . . . 예컨대 일, 일, 일, 일 . . . 하는데 실은 저런 게 떠 있는 것입니다. 돈, 돈, 돈, 돈 하고 있는데 갑자기 저래버리니 . . . 문득 이젠 예전처럼 살 순 없다는 생각도 들고요. 그런데 밥 볶는 얘길 좀 했기로서니, 그게 무슨 잘못이란 말입니까? 인간이 좀

호올스

하면 어떠냐는 것입니다. 왜 저런 게 나타나 기분을 복잡하게 하는지, 또 하필 이곳에 나타난 이유는 뭔지 . . . 불쾌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존재의 고민, 그런 건가? 잘은 몰라도 비슷한 느낌입니다. 어차피 적응은 하겠지만 . . . 적응할 거면서 왜 그래? 담배라도 문 표정으로 부장이 말했다. 말하자면 칠십일층에서, 부장은 칠년 전에 담배를 끊었다. 연기, 같은 것이 그러나 그 순간 부장과 나 사이에 자욱한 느낌이었다. 좋잖아? 라고 부장이 물었다.

이데올로기도 없는데

저런 거라도 있으니 말이야. 몹시도 잠이 쏟아지는 기분이었다. 그건 . . . 그렇죠 뭐, 어금니 사이에 물고 있던 호올스를 굴리며 나도 중얼거렸다. 자자, 일하자구. 방수방화 시멘트벽의 얼굴이 툭툭 어깨를 치며 속삭였다. 모쪼록 툭툭 어깨를 쳐준다거나, 아무튼 그런 것에 나는 마음을 여는 스타일이었다. 툭툭, 그리고 그만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기분이 되었으니까.

다시 근무가 시작되었다. 오후의 시작과 함께 중역회의의 결과랄까, 짧고 간략한 사장의 사내방송이 있었다. 요는 정부의 발표가 있기 전까지 침착하게 각자의 업무에 열중해달라는 것이었다. 침착하지 않는다 한들 어쩔 수 없는 게 아닌가, 하늘을 장악한 그<것>을 바라보며 누구나 생각했을 것이다. 현대의 재난이란 . . . 분명 이런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 . . 앉아서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모쪼록 그런 것이라고 요실금팬티의 런칭에 관한 프리마케팅 자료를 펼치며 나는 생각했다.

너무한 거 아니냐? 역시나 요실금팬티의 런칭에 관한 프리마케팅 자료를 펼쳐놓고, 옆자리의 곽이 속삭였다. 뭐가? 회사 말이야. 적어도 재택근무라든지, 그런 결론을 내려야 하는 거 아니냐 이 얘기지. 일이라니 나 참, 부은 얼굴로 곽은 투덜거렸다. 나는 굳게 입을 닫았다. 가능한 한, 근무태도와 직결된 얘긴 삼가는 게 상책이니까. 저러다 붐, 광선을 쏠지도 모르는 거잖아. 영화에서처럼 말이야. 곽의 말에 나는 짜증이 치밀었다. 아아 . . . 광선 얘긴 제발 . . . 광선은 말이야, 하고 거칠게 자료를 덮으며 내가 말했다.

쏘지 않아.

쏘지 않는다구. 알겠어? 역시나 자료를 덮으며 곽도 얼굴을 붉혔다. 무슨 반론을 펼치기보다는, 대신 몇초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아니 뭐, 하고 나는 말을 얼버무렸다. 다른 뜻이 아니라 지식인답게 생각하자 이 얘기야. 곽은 곧 잠잠해졌다. 주위의 시선을 느낀 건 나뿐이 아니었을 것이다. 나 참, 농담한 걸 가지고 . . . 하더니 곽은 지끈 머리가 아프다며 서랍을 뒤지기 시작했다. 나는 집중해서

일을 했다. 머리 위엔 직경이 십 킬로미터나 되는 게 떠 있고, 나는 일을 한다—그래서 뭐가 어쨌단 거냐. 침략을 당한 것도 아니고, 아무튼 직접적인 재해가 닥친 건 아니니까. 늘 그랬듯, 일은 모든 걸 잊게 해주었다. 지루하긴 해도 그래서 나는 편안한 기분이었다. 세시쯤엔 마케팅연구소를 방문했다. 곽과 함께 브리핑을 받고, 또 그곳의 팀장과 환담을 나누었다. 중요한 피티라면서요? 편안한 어투로 팀장이 물었으므로 편안하게 그렇다고 대답했다. 브리핑 때 말씀드리지 못한 몇가지 사례들이 있는데, 말하자면 C, D, E안 정도의 참고사항들입니다. 팀장은 차근차근 70년대 미국의 전화기 시장, 또 90년대 일본 백화점들의 세일 경쟁 사례들을 들려주었고 또 거기서 현재 한국의 요실금팬티 시장에 적용할 만한 몇가지 해법들을 간추려주었다. 그러니까 C, D, E안이라는 말씀이시죠? 그렇습니다 C, D, E안! 뭐, 그런 얘기를 나누었다. 우리는 남은 찻잔을 기울였다. 여기서도 잘 보이는군요. 창밖을 쳐다보며 곽이 말했다. 그럴 수밖에요. 빙긋이 미소를 띠며 팀장이 대답했다. 어쨌거나

세계적인 거

아니겠습니까? 그러고 보니 . . . 그렇군요. 팀장님은 불안하지 않습니까? 글쎄요, 어쨌거나 지난 한 주 저는 요실금팬티에 대해서만 생각했습니다. 대단하시군요. 별말씀을. 뉴스 속보를 본 것은 연구소를 나와 광장을 가로지르면서였다. 아마도 오후, 다섯시 정도였을 것이다. 북적이는 인파 속이었고, 언론사의 벽면에 설치된 대형 전광판을 통해서였다. 속봅니다. 서울 상공에 출현한 괴물질의 정체가 밝혀졌습니다. 정부의 공식발표현장을 직접 연결합니다. 눈에 익은 장관의 얼굴이 잠시 후 모니터에 나타났다. 사건의 개요와 진행, 조사위의 발족과 연구 과정, 각국의 과학자들이 참가한 실험과 검증 . . . 장광설 끝에, 그리하여 저 물질은 백 퍼센트 순수한 <아스피린>이란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아스피린? 순간 귀를 의심했지만 곧이어 단상에 오른 조사위의 과학자가 무수한 검증을 거쳤다는 발표를 했다. 자연 상태에서 어떻게 이런 현상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선 아직 알 수가 없습니다. 한국의 기후조건이 빚은 이상현상인지, 또 어떻게 저런 거대한 결정이 부양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모두가 지속적으로 밝혀야 할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무려 한 시간을 넘긴 발표와 인터뷰를, 그러나 끝까지 우리는 지켜보았다. 아스피린이라니. 광장의 인파 전체가 거대한 <붐>에 휩싸이던 순간이었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근처의 벤치에 앉아 아스피린이 떠 있는 하늘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웬일인지 머리가 아파왔다. 그런, 기분이었다. 빅토리아 아이스크림. 영국 왕실이 즐기는 바로 그 맛. 바닐라, 스트로베리, 초콜릿. 근처의 캐링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내가 물었다. 아이스크림 먹을래? 곽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닐라? 아니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해치우고 우리는 회사로 돌아왔다.

방송 봤어? 서른두 명의 친구로부터 문자가 들어왔지만, 나는 한 통의 답문도 보내지 않았다. 이상하게 피곤하고, 맥이 빠지는 오후였다. 머리가 실제로 아파왔지만 나는 약을 먹지 않았다. 대신 서랍에서 꺼낸 아스피린 하나를 손끝으로 이리저리 굴려보았다. 말 그대로, 아스피린이었다. 말 그대로, 아스피린이라니. 자료실을 찾은 나는 이런저런 책들을 뒤적여 아스피린에 관해 알아보았다. 아스피린은 버드나무의 성분을 기본으로 한 약이었고, 기원전부터 인류는 버드나무의 잎과 껍질을 진통제로 사용해왔다. 오래고, 부드러운 것이었군. 책들을 정리하며 나는 메모를 끄적였다.

1897년 독일 바이엘 사의 호프만이 아스피린(아세틸살리실산) 합성에 성공
1899년 아스피린이 베를린 특허청에 상품명으로 등록
1899년 최초의 아스피린이 시장에 출시
1925년 유럽 전역에 독감 유행, 아스피린이 수많은 생명을 구함
1971년 스미스 앤 윌리스가 아스피린의 프로스타글란딘 억제 작용을 증명
1978년 아스피린의 뇌졸중 예방 효과가 증명
1995년 바이엘 아스피린 전세계 90개국 이상에서 110억 정 이상 판매
1999년 아스피린 탄생 1백주년

그리고 메모의 끝에—2009년 6월 아스피린 침공, 이라고 적어보았다. 뭐 하나? 부장의 목소리였다. 아, 하고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아스피린에 대해 조금 조사해봤습니다. 부장은 말없이 하긴 뭐, 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자네가 쓴 메모인가? 그렇습니다. 어디 줘보게. 순순히 나는 메모지를 건네주었다. 짧은 메모를, 그러나 오랫동안 부장은 들여다보았다. 써놓고 보면 꼭 이런 식이란 말이지. 뭐가 말입니까? 아스피린이건 . . . 산업혁명이건 . . . 뭐든지 말이야. 그러게 말입니다. 적응이 힘든가?

그런 건

아닙니다. 창밖을 응시하며 나는 말을 이었다. 어쨌거나 . . . 세계적인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거겠지. 저녁 먹고 곧바로 회의란 거 알지? 메모를 돌려주며 부장이 말했다. 네, 라고 답한 후 나는 메모를 와락 구겼다. 오래고, 부드러운 느낌의 질감이 한 알의 결정처럼 작고 단단하게 뭉쳐졌다. 휙, 그리고 그것을 휴지통에 던져버렸다. 무언가 <옛날의 지구> 같은 걸 버려버린 기분이었다. 아스피린 침공. 누가 뭐래도

세계는 달라졌다.

이후의 일들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저녁부터 밤까지 요실금팬티에 대한 열띤 토론을 벌였다. 열한시가 다 되어 회의를 마쳤다. 한시까지 두 개의 시안을 완성했다. 호프에서 다 같이 맥주를 마셨다. 집으로 돌아왔다. 우두커니 침대에 앉아 창밖의 아스피린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잠이 들었다. 깊은 잠이었다.

다음날 곽은 결근을 했다. 지독한 감기몸살이라고는 했지만, 사실이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괜찮을까? 황보가 물었다. 괜찮을걸. 내가 답했다. 글쎄 발디딜 틈이 없더라구요. 외근을 갔다 온 신입 하나가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광장은 말할 것도 없고요, 도심 전체가 마빕니다. 일본인들이 특히, 그리고 중국인이나 유럽인들도 단체로 북적여요. 이러다 관광특구로 지정되는 거 아닐까요? 하긴 뭐, 라고 나는 생각했다.

남은 건 모두의 적응이다.

뉴스의 헤드라인도 온통 아스피린에 관한 것이었다. 세계 석학들의 입국, 독일 바이엘 사 자사와 어떤 연관도 없다는 입장 표명, 아스피린에 대한 외신과 가십, 동북아 국가 정상들 공동 연구체제 협의, 중국 정부 아스피린의 기원은 중국이라고 발표, 미국 위기에 빠진 한국 정부에 최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 밝혀, 또 정부의, 관련 부서의, 시민단체의, 종교지도자들의 성명, 현황, 이견, 발언. 하긴 뭐, 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다음 날 곽은 출근을 했다. 괜찮나? 부장이 물었다. 네. 힘없는 목소리로 곽이 대답했다. 괜찮아? 내가 묻자 뭐, 그렇다기보단 . . . 하루종일 음악을 들었어. 음악? 많이 우울했거든. 우울이라니? 그냥 그렇게 우울하더라구. 실체를 몰랐을 땐 불안했는데 . . . 뭐, 이젠 어쩔 수 없는 거잖아. 게다가 아스피린이라니. 아스피린이라면 . . . 나쁘다고도 할 수 없는 거잖아. 어쩐지 그래서 우울한 심정이야. 나쁘다고도 . . . 말 못하니까.

임팩트 말이야, 그게 없어. 피티 준비가 막바지였다. 곽의 우울과는 상관없이, 철야를 해야 할 분위기의 저녁이었다. 바로 저런 거 말이야. 확,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는 그런 아이디어를 내란 말이야. 창밖의 아스피린을 지목하며 국장이 직접 진두지휘를 시작했다. 알겠습니다. 쩍 금이 간 방수방화 시멘트벽이 고개를 떨구며 대답했다. 너무해, 너무한 거 아냐? 호올스의 포장을 까며 라이가 투덜거렸다. 아, 스위스제 퐁듀 먹고 싶어. 기지개를 켜며 황보가 소리쳤다. 이럴 때 먹으면 <지잉> 하고 위에 울림이 올 텐데. 퐁듀보다는, 나는 파스타가 먹고 싶었다.

결국 다음날 단체로 몰려가 스위스제 퐁듀를 먹고 왔다. <지잉> 하지 않아? 배를 두드리며 황보가 말했지만, 나는 온통 요실금팬티 생각뿐이었다. 생긴 지 얼마 안된, 테라스가 오픈된 유럽식 레스토랑이었다. 그런데 왜 아스피린일까? 배를 두드리던 황보가 중얼거렸다. 하물며 저렇게 큰 아스피린이라니. 뭔가 머리 싸맬 일이 많아질 거란 경고 아닐까? 이어폰을 귀에서 떼며 라이가 말했다. 어쨌거나 나쁘다고는 말할 수 없잖아. 퐁듀를 절반이나 남긴 곽이 우울한 얼굴로 얘기했다. 곽의 그 말에 나도 그만 기분이 우울해졌다. 생각해보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일, 일, 일, 일, 회의, 회의, 회의, 회의, 퐁듀. 비록 잠깐 퐁듀가 끼어들긴 했어도, 우울할 수밖에 없는 성분의 조합이 아닐 수 없다. 파스타를 먹었다면

달랐을까?

건조한 날씨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정말 세계적이긴 해, 안 그래? 아닌게아니라 테라스에서 내려다본 광장은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또 아스피린 위로는 갖가지 중장비들이 헬기에 실려 이송되고 있었다. 보는 이에 따라 그 느낌도 다르겠지만, 대단한 장관이 아닐 수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뭘 하려는 걸까? 황보가 물었다. 우리야 알 수 없지. 곽이 중얼거렸다. 하긴 뭐, 곽을 따라 나도 중얼거렸다.

경쟁 프레젠테이션에서 우리는 승리했다.

명예, 라는 컨셉은 주효한 승부수였다. 삼십 퍼센트에 속해 있습니다, 하지만 이 퍼센트에도 속해 있습니다. 카피를 쓴 것은 곽이었고, 중세 유럽의 백작부인을 비주얼로 잡은 것은 라이였다. 요실금을 앓는 한 사람의 환자가 아니라, 지켜야 할 명예가 있는 이 퍼센트의 인사(人士)로 고객을 예우하는 것입니다. 뚜렷하고 설득력 있는 목소리로 피티를 진행한 것은 부장이었고 오 예, 가장 큰 환호를 지른 것은 황보였다. 하긴 뭐, 나는 중얼거렸다.

그날밤엔 곽과 둘이서 술을 마셨다. 휘영청 아스피린이 떠 있는 밤이었다.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고, 말하자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술을 마신 것이었다. 나는 겨우 기네스 두 병을, 곽은 열세 병의 코로나를 비웠다. 차라리 말이야, 붐, 광선이라도 쏴대면 얼마나 좋을까 . . . 이건 뭔가 잘못된 거라고도 말할 수 없는 거잖아. 몽롱한 표정으로 곽이 흥얼거렸다. 아스피린은 말이야, 하고 또렷한 의식으로 내가 답했다. 광선은 쏘지 않아.

바를 나온 건 새벽이었다. 내리는 비를, 모처럼의 비를 볼 수 있었다. 가까운 편의점에서 우산을 살까 하다가, 말았다. 한 점 한 점, 곽의 군청색 셔츠 위에 옅은 얼룩이 생기기 시작했다. 은근히 흰, 빗물에 녹아 있는 아스피린이었다. 말없이 걷던 곽이 머리칼을 털며 물었다. 뭘 할 수 있을까. 우린 . . . 뭘 할 수 있지? 말없이 비를 맞을 뿐,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서둘러 나는 택시를 잡기 시작했다.

아닌게아니라, 지배를 받는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부장과 점심을 먹다가 문득 그런 말이 나왔다. 아스피린이 . . . 누구를 지배한다고는 할 수 없잖아. 그건 그렇지만 말입니다 . . . 하지만 아무튼 저렇게 떠 있으니까요. 기분이 나쁘다는 건가? 그렇다기보다는 . . . 잘 적응을 하다가도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스피린을 탓하기는 그렇지 않은가. 그러니까요. 차라리 광선이라도 쏴대면 얼마나 좋을까, 어제는 글쎄 그런 생각마저 드는 것이었습니다. 지식인으로서 부끄러운 얘기지만, 아무튼 그런 것입니다. 아스피린 때문에 자네 참 고민이 많군. 실은 그게 가장 큰 의문입니다. 의문이라니?

고민이란 게 사라졌거든요.

여름엔 다섯 차례의 비가 내렸다. 짤막한 소나기가 아니라, 비가 내렸다고 기억될 만큼의 비를 말하는 것이다. 그때마다 아스피린은 녹았지만, 아스피린의 크기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거기에 비해 황보는 삼 인치나 허리둘레를 줄였다. 말하자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이어트에 성공한 것이었다. 휴가를 다녀온 후 황보도 잠시 우울증을 앓았는데, 뱃살이 줄고 난 후 얼굴이 밝아졌다. 다섯 개의 가요프로그램을 꾸준히 시청하니 절로 기분이 좋아지던걸. 밝은 얼굴로 황보는 재즈댄스를 배우기 시작했다.

7월인가, 그리고 작은 집회가 있었다. 소규모의 데모였지만 아스피린에 항의하는 이들도 있구나, 란 생각에 인상이 깊었던 집회였다. 짧게나마 뉴스에서도 내용을 다뤄주었다. 그냥 답답해요, 도대체 아스피린이 왜 떠 있는 겁니까, 정부가 조속히 해결해야 할 문제죠, 음모가 있습니다, 그냥 묵과할 순 없는 일이죠, 이러다 타이레놀도 생기면 큰일 아니겠습니까? 전 그냥 친구 따라온 거예요. 시위는 한 시간이나 이어졌다, 고 했다.

8월 중순에 라이는 어소티드를 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올스, 하기로 했어. 나에게만 살짝 라이는 어소티드를 건네주었다. 좋겠다, 라고 나는 말해주었다. 그리고

정말 아무 일 없이

가을이 왔다. 9월엔 WTO 총회가 개최되어 아스피린을 역사적인 장소로 만들었는데, 실효성보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큰 총회였다. 아스피린에 마련된 회의장에 산소마스크를 쓴 각국의 각료들이 앉아 있는 광경은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사진은 외신을 타고 전세계의 이슈가 되었고, 즉각 코카콜라와 바이엘, 한국크라이슬러의 광고 오브제로 사용되었다. 크라이슬러의 비주얼 작업을 한 것은 라이였다. 미국의 본사도 깊은 관심을 보였으므로 라이로선 의욕이 앞설 수밖에 없는 작업이었다. 아스피린이 살길이었어. 작업을 거든 황보가 턱수염을 쓸며 일, 일했다.

자넨 어떤 인물이 되고 싶나? 크라이슬러 건의 자축연에서 부장이 물었다. 글쎄요, 어차피 별다른 고민도 없고 . . . 히카르도 페레스 정도의 카피라이터나 될까 합니다. 집어든 버번을 비우고 나서야 나는 겨우 답할 수 있었다. 고민이 없다는 건 좋은 일이군. 고개를 끄덕이며 부장은 마티니를 마셨다. 아무런 고민 없이, 나는 아스피린을 쳐다보았다.

대응할 수 없을 때 인류는 적응한다. 자료실에서 찾은 히카르도 페레스의 타이어 광고엔 그런 헤드라인이 얹혀 있었다. 훌륭한 카피가 아닐 수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사막과, 빙판과, 늪지대와, 자갈길 위에 커다란 타이어를 배치한 시리즈 광고였다.

그리고 어느날 아스피린이 속출했다. 동남아에, 중남미에, 아프리카에, 동유럽 곳곳의 상공에 같은 크기의 아스피린이 나타난 것이었다. 뭐야 이건, 우리가 예제(例題)였다는 기분마저 들잖아. 속보를 보며 라이가 한숨을 쉬었다. 이젠 뭐 . . . 세계적이라고도 말 못하겠는걸. 아쉽다는 표정으로 황보도 말을 거들었다. 하긴 뭐, 그래서 아스피린은 세계적인 게 되었다고 나는 생각했다. 혼자서 음악을 들으며 곽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새로운 세계가 시작되었다고도, 나는 생각했다.

뭘 할 수 있을까?

곽이 했던 질문을 나는 스스로에게 던져보았다. 마땅한 답은 역시나 떠오르지 않았다. 지갑을 열고, 신분증을 뒤져보고, 사원증과 여러 장의 신용카드를 일일이 꺼내보았다. 나는 일을 할 수 있고, 나는 물건을 살 수 있다. 확실히 나쁘다고는 말할 수 없는 삶이다. 한 장의 메모지를 펼쳐놓고 나는 다시 메모를 시작했다. 일단 사야 할 물품들의 목록과, 언젠가는 사야 할 물품의 목록을.

새로 나온 아이폰, 노트북 케이스, 시계, 겨울 코트, 무선 수신포트, 십오 와트 스피커, 세제, 모니터, 무소음 청소기, 싱글형 니트 넥타이, 스키복, 방향제, 습기제거제 풀세트, 프랜시스 베이컨 화집, 이십세기의 음악 시디 세트, 세 권의 잡지, 쌀, 식빵, 호박 잼, 스트로베리 잼, 비타민, 미네랄 영양제, 카메라, 전자지능 다리미, 앤틱 라디오, 마사지 체어, 보텀 스탠드, 수족관, 공기청정기, 매직고데기, 슬림에어컨, 커피메이커, 가습기, 스킨케어, 헤어케어, 외장 하드, 운동화, 스노우보드, 커터형 면도기, 액자, 에스 보드, 시트커버, 로보 미니, 아니 그보다는 메르세데스 벤츠 . . . 써놓고 보니 <지상 최대의 행복>이란 카피가 떠올랐다. 히카르도 페레스의, 그러니까 . . . 그게 어떤 광고였더라? 우두커니

아스피린을 바라보며

부장은 서 있었다. 휴게실은 고요했고, 창밖의 세계도 고요했다. 뭐 하십니까? 아 . . . 아스피린이 떠 있는 나라들을 생각했네. 특별한 이유라도? 거기서도 누군가 지금 나처럼 아스피린을 보고 있지 않을까 하고. 누군가는 . . . 보고 있겠죠. 다시 아스피린을 쳐다보며 부장은 중얼거렸다. 실은 나 고소공포증이 있는데 말이야, 중증이야. 그런데 매일 칠십일층에서 근무해야 하잖아. 이백대 일 경쟁률을 뚫고 아파트를 분양받았어. 이십삼층이야. 매일 거기서 쉬고, 잠을 자며 살고 있어. 이상하지 않나? 글쎄요, 그러나 아무튼

나쁘다고는 할 수 없다고, 나는 대답했다. 아무도 없는 휴게실에서 아무 말 없이 우리는 서 있었다. 나쁘다고는 말할 수 없는 세계의 어딘가에 순간 올라올 만큼 올라와버린 느낌이었다. 지끈, 현기증이 일었다. 그저 떠 있는 아스피린을 바라보다 툭툭, 어깨를 치며 부장이 말했다. 자, 일해야지.

예, 하고 나는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