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프레이

Kim Kyung-uk

Illustration by Gianna Meola

그가 남의 택배 상자를 들고 온 것은 실수였다. 무심코 송장을 보았을 때는 이미 퍼장 테이프를 반쯤 떼어낸 뒤였다. 109호. 상자 옆면에 매직팬으로 휘갈겨진 숫자를 확인하는 그의 얼굴을 굳어졌다. 경비가 적어놓은 숫자는 709로 보이기도 했다. 새로 온 경비라 필체가 누에 설었다. 게다가 필요한 물건을 대부분 인터넷으로 준문하는 그는 퇴근길에 빈손으로 올라오는 날이 드물었다. 납득 못 할 실수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로서는 자신의 부주의한 행동이 의아스러웠다. 문자메세지조차 퇴거해서 보내는 그였다. 평서 같으면 포장 테이프를 떠기 전에 송장부터 체크했을 것이다. 뭔가 헝클어진 기분이었다. 축축한 손을 잡고 있는 것처럼 불쾌했다.

  사실 축축해진 것은 그의 손이었다. 긴장할 때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증상이었다. 첫사랑에게 차인 것도 축축해진 손 때문이 분명했다. 손을 처음 잡고 며칠 뒤 돌연 결별 통보를 받았으니 다른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그 뒤로 여자의 손을 잡아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발이라면 셀 수도 없이 만져보았지만. 오늘만도 스물한 명의 발을 상대했다. 그는 유명 백화점 숙녀화 매장의 매니저였다.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객의 발에 구두를 신기고 앞코와 뒤꿈치를 확인하는 게 일이었다. 고객에게도 가급적 손은 멀리했다. 카드를 받고나 물건을 건넬 때 손이 닿지 않도록 주의했다. 어쩌다 스치기만 해도 그는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랐다. 손은 앞발일 뿐이라고 주문을 걸어도 별 효과가 없었다.

  그는 손을 바지에 문지르며 뭐가 잘못됐는지 따져보기 시작했다. 손이 축축해진 것은 남의 집 택배를 들고 왔기 때문이고 남의 집 택배를 들고 온 것은 집중력이 떨어졌기 때문이고 집중력이 떨어진 것은 피로감 때문이고 피로감은 밤잠을 설쳤기 때문이고 밤잠을 설친 것은 옆집 고양이의 울음소리 때문이었다.

  실수의 원인이 밝혀지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였다. 같은 실수를 되풀이할 확룰이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축축한 손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여자의 손을 멀리함으로써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었다. 첫사랑에게 차인 이우를 찾아내지 못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랑을 얻는 것보다 실수를 피하는 게 더 중요했다. 그가 실수를 저지르면 아버지는 버럭 소리부터 질렀다. 넌 대체 뭐 하는 놈이야? 그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곤 했다. 그러면 아저니는 혀를 차면 중얼거렸다. 축축한 놈.

  그는 반쯤 떼어낸 테이프 위에 새로 테이프를 붙였다. 어설펴 보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뜯어본 것을 눈치채더라도 누군지는 짐작도 못 할 것이었다. 본재 자리에 돌려놓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는 상자를 들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경비실에 앉아 있는 경비를 본 순간 그는 멈칫했다. 택바 상자들은 경비실 맞은편 벽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경비의 눈을 피해 상자를 갖다 놓을 방법은 없었다. 잘못 집어갔다는 구구한 변명은 불가피했다. 남의 택배를 뜯어보는 사람 취급받기는 싫었다. 번거롭겠지만 경비가 없는 틈에 갖다 놓는 게 낫겠다 싶었다. 그는 발길을 돌렸다.

 

  다음 날 퇴근길, 아파트 입구로 들어서던 그는 경비를 다그치는 한 중년 여자의 모습에 흠칫했다. 그는 택배 상자들을 살피는 척하면서 여자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상자에 발이라도 달렸단 말인가요?

  109호가 분명했다.

  귀중품으라도 들어 있습니까?

  경기가 기어드는 목소리로 물었다.

  사소한 거라면 이렇게 흥분하겠어요? 이래서 CCTV를 설치하자고 했던 건데 몇 푼이나 된다고 그걸 반대해. 절이 싫이면 중이 떠나야지. 거지 같은 아파트.

   경비는 입을 꾹 다문 채 모자챙만 만지작거렸다.

   그는 709호하고 적힌 상자를 집어 들고 잰걸음으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뒤통수가 따가웠다. 109호의 택배를 돌려놓을 수 없게 되었다. 실수를 만회할 기회가 영영 날아가버린 것이다. 모두 그놈의 고양이 때문이었다. 엘리베이터의 닫힘 버튼을 누르는 그의 손이 축축해졌다.

  그는 옆집 문 앞에 놓은 검은 비닐 봉지를 걷어찼다. 플라스틱 그릇들이 비어져 나오는가 싶더니 먹다 남은 짜장면 가닥과 단무지가 바닥에 쏟아졌다.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복도는 텅 비어 있었다.

  문을 열다 말고 그는 바닥에 쏟아진 음식 찌꺼기를 바라보았다. 한숨이 나왔다. 그는 주방에서 일회용 비닐장갑을 챙겨 다시 밖으로 나갔다. 비닐장갑을 낀 손으로 음식 찌꺼기를 그릇에 담고 향균 물티슈로 바닥을 박박 닦았다. 비닐 봉자를 걷어찼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그뿐이었다. 그 사실이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돌려줄 수 없게 된 택배 상자를 한참 노려보다 그는 포장 테이프를 거칠게 뜯었다. 상자의 종이가 테이프에 딸려 북 찢어질 때는 짜릿한 쾌감에 몰을 떨었다. 전에 느껴본 적 없는 뜻밖의 쾌감에 그는 당황했다.

  첫사랑과의 술자리가 문득 떠올랐다. 첫사랑은 손을 처음 잡던 날이었다. 꽤 마셨을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서 때 여자애가 말했다. 이 컵 예쁘다. 갖고 싶어. 그가 보기에는 평범안 유리컵에 불과했지만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아름다운 컵이라도 되는 양 호들갑이었다. 취기 때문이었을까. 그는 컵을 점퍼 주머니에 슬쩍 집어넣었다. 가슴이 벌렁거렸다. 뭔가를 저지른 것처럼 흥분됐고 들통 날까 봐 겁도 났다. 카운터에 컵을 올려놓은 뒤 그는 목소리는 낮춰 종업원에게 물었다. 이 컵, 얼마 드리면 됩니까?

  그는 택배 상자를 열었다. 화장 솜부터 매니큐어까지, 잡다한 미용 용품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쓸 만한 것은 땀냄새 제거용 스프레이뿐이었다. 겨드랑이에 뿌리는 스프레이. 그는 스프레이를 허공에 뿌려보았다. 라벤더 향이 났다. 스프레이만 빼고 모두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가 또다시 남의 집 택배를 들고 온 것은 실수가 아니었다. 다른 사람의 택배 상자를 뜯을 때의 쾌감을 잊을 수 없었다. 이번에는 옆 동에서 가져왔다. 경비가 자리를 비운 틈을 노렸고 들고 오기 편하게 작은 상자를 택했다.

  그는 엘리베이터를 가디라며 내용뮬을 상상했다. 상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바지 자락이 축축하다 싶더니 지린내가 진동했다. 돌아보니 고양이가 한 마리 있었다. 옆집 고양이였다. 언제간가 옆집 여자가 안고 가는 걸 봤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열룩 고양이였지만 자신을 바라보던 거만한 표정은 잊을 수 없었다. 더 잊을 수 없는 것은 여자의 뒤태였다. 스커트 아래도 쭉 뻗은 다리가 인상적이었다. 그의 손이 축축해졌다. 지린내도 지린내거니와 내내 뒤척였던 간밤의 기억이 새삼스러웠다. 고양이는 잠잠해지나 싶다가도 다시 울어댔다. 당최 눈을 붙일 수 없었다. 여자의 구두 소리가 들려온 것은 언제나처럼 새벽 5시쯤이었다. 그는 밤을 꼴딱 새운 것이다. 여자는 늘 그 시간에 퇴근했고 그는 같은 시간에 눈을 떴다. 여자의 구두 소리가 달갑지 않은 그였다. 그 소리만 아니면 한두 시간은 더 잘 수 있을 테니까. 귀가 남달리 예민한 것은 아닌데 이상하게도 옆집 여자의 구두 소리만 들리면 눈이 번쩍 뜨였다. 좋든 싫든 그는 여자의 샤워 소리를 들으며 똥을 누고, 여자가 켠 라디오 소리를 들으며 넥타이를 매고, 여자가 고양이를 어르는 소리를 들으며 집을 나서야 했다.

  평소처럼 여자의 샤워 소리를 들으며 변기 위에 앉아 있었지만 그는 똥을 누지 못했다. 잠을 설친 탓이었다. 햐루가 엉망이 될 조짐이었다. 습관적으로 물을 내리는데 울컥 부아가 치밀었다. 화장실에서 나오자마자 인터폰 수화기를 집어 들고 옆집 번호를 눌렀다. 지루하게 울리는 신호음을 들으며 그는 마른침을 삼겼다. 옆집 여자와의 통화는 처음이었다.

  여보세요?

  옆집입니다.

  여자의 목소리에는 경계심이 징처럼 박혀 있었다.

  고양이 울음 때문에 한숨도 못 잤습니다.

  그는 정중히 말했다.

  어머, 정말로요?

  정말입니다.

  이상하다. 우리 애기는 안 우는데.

  분명히 울었습니다. 게다가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옆집 여자가 물었다. 

  몇 호시죠?

  그는 움찔했다. 손이 축축해졌다.

  709홉니다.

  손바락을 바지에 문지르며 그가 대답했다. 

  다른 집에서는 아무 말 없었는데.

  밤새 한숨도 못 잤단 말입니다.

  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아홉 켤레나 신어보고 그냥 돌아선 고객에게도 깍듯이 인사하는 그였다. 적막한 집 안에서 울려 퍼지는 자신의 날 선 목소리가 낯설었다.

  알겠어요.

  그게 다였다. 미안하다거나, 조심하겠다는 말은 없었다. 딸각, 전화가 끊겼다. 수화기를 맥없이 내려놓으며 그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알겠어요. 손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는 고양이를 노려보았다. 야옹. 고양이가 꼬리를 살랑거리더니 휴대폰으로 통화 중인 젊은 여자의 발을 핥았다. 옆짐 여자였다. 고양이가 저지른 짓을 항의하려던 그는 여자가 자신을 바라보는 순간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는 손바닥을 바지에 문지르며 곁눈질로 여자를 살폈다. 오늘은 일을 나가지 않을 건가? 여자는 분홍색 트레이닝복 차림이었다. 엉덩이에는 분홍을 뜻하는 영어 철자가 프린트되어 있었다. 그가 딱 싫어하는 스타일이었다. 말 엉덩이에 찍힌 낙인이 떠올랐다. 뭐랄까, 저속했다.

  옆집 여자는 통화하면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그는 여자의 뒤를 따랐다. 옆집 여자는 엘리베이터에 부착된 거울을 보느라 등을 보인 채 서 있었다. 고양이가 엘리베이터 구석을 향해 돌아서는가 싶더니 털을 곤두세우고 꼬리를 바짝 치켜든 채 분비물을 찍 발사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고양이가 먼저 내렸다. 그는 맨 나중에 내렸다. 여자는 여태 통화 중이었다. 그는 옆집 여자의 뒤태를 감상하며 천천히 걸었다. 고양이가 복도 한쪽에 세워진 자전거 바퀴에 대고 다시 분비물을 발사했다. 그는 자신의 바지 자락에 묻은 얼룩을 새삼 내려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집에 들어온 그는 바지부터 빨았다. 세제를 듬뿍 풀었지만 지린내는 좀체 가시지 않았다. 그는 바지를 건조대에 널고 얼룩이 졌던 자리에 땀냄새 제거용 스프레이를 잔뜩 뿌렸다. 고양이의 분비물이 몸에 묻디라도 한 듯 꼼꼼하게 샤워도 했다.

  옆 동에서 집어 온 택배 상자를 앞에 두고서야 그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테이프를 뜯을 때는 어김없이 강렬한 쾌감을 맛보았다. 숨통을 조이던 넥타이를 풀어 던진 것 같은 해방감이었다. 상자에 담긴 것은 플라스틱으로 만든 강아지 모양의 장난감이었다. 태엽도 달려 있었다. 태엽을 감아주자 멍멍 짖으며 앞으로 걸어가다 꼬리를 풍차처럼 돌리며 옆으로 굴렀다. 태엽이 다 풀렸을 때 강아지는 배를 드러낸 채 누워 있었다.

  그가 강아지를 집어 들고 쓰레기통 쪽으로 걸어가는데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옆집 초인종이었다. 그는 출입문애 바짝 붙어 귀를 기울였다. 나야. 사내의 굵은 목소리. 자물쇠가 풀리는 소리와 문을 여닫는 소리가 차례로 들렸다.

  그는 물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밖은 이제 어둑어둑해졌다. 그는 복도 난간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강아지의 태엽을 감아 난간 턱에 올려놓았다. 강아지는 멍멍 짖으며 앞으로 걸어갔다. 난 끝을 향해. 그각 손을 뻗었지만 강아기는 난간 너머로 떨어지고 말았다. 강아지의 꼬리가 허공에서도 풍차처럼 돌아갔다. 강아지가 박살나는 소리가 짜릿했다. 그는 주위를 둘어보았다. 복도에도 아래에도 인적은 없었다.

  옆집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 것은 한 시간쯤 뒤였다. 그는 옆집 문이 닫히는 소리를 확인하고 슬그머니 밖을 내다보았다. 저만치 걸어가고 있는 사내는 트레이닝복 차림이었다. 그날 밤에는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가 또다시 남의 택배 상자를 들고 온 것은 역시 실수가 아니었다. 그는 실수를 되풀이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다음도, 그다음도 마찬가지였다. 동을 바뀌가며 택배 상자를 집어 왔다. 한 번 들른 곳에는 다시 가지 않았다. 깜박할까 봐 아파트 단지 지도에 표시까지 했다.

  그에게 택배의 내용물은 관심거리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남의 택배 상자를 거칠게 뜯을 때 느끼는 해방감이었다. 내용물은 애당초 관심거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옆집 택배 상자를 들고 온 것은 해방감을 위해서가 아니라 호기심 때문이었다.

  백화점 정기세일 첫날이었다. 허리를 펼 새가 없을 정도로 손님이 밀어닥쳤다. 퇴근길에는 어서 씻고 침대에 누울 생각뿐이었지만 택배 상자들을 그냥 지나치지는 못했다. 상자에 취갈겨진 숫자를 일별하던 그의 눈이 커졌다. 그는 숫자를 재차 확인했다. 108호가 아니라 708호가 분명했다. 옆집의 택배 상자를 보기는 처음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가 남의 집 택배를 집어 오게 된 이후로 처음이었다.

  경비는 졸고 있었다. 그는 옆집의 택배 상자를 집어 들었다. 호기심도 호기심이었지만 분노 때문이기도 했다. 고양이 울음소리 때문에 잠을 설치는 밤이 잦아졌다. 고양이는 여자가 없을 때만 울어댔다. 여자가 집에 돌아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졌다. 그래서인지 그의 항의는 번번히 묵살되었다. 여자는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 적반하장이 따로 없엇다. 여자는 부쩍 신경이 날카로워진 듯했다. 주말 저녁에 잠깐 다녀가는 사내와도 자주 다투는 눈치였다. 신경이 예민해져서 사내와 다투는 것인지 사내와 다튀서 신경이 예민해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사내의 옷차림이었다. 사내는 언제나 트레이닝복 차림이었다. 사내의 뒷모습이 복도 저쪽 비상계단 통로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언제나 그의 몫이었다.

  상자는 크지 않았지만 가볍지도 않았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엘리베이터는 15층에 서 있었다. 늘 그랬다. 망할 놈의 엘리베이터. 모두 꼭대기 층에만 몰려 사는 것 같았다. 그는 비상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가기 시작했다. 온몸의 근육이 팽팽해지는 느낌이었다. 간만에 느끼는 활력이었다.

  현관문을 닫았을 때 그는 땀에 푹 절어 있었다. 긴장이 풀리면서 나른한 피로감이 밀려왔다. 그는 더운물을 채운 욕조에 몸을 담근 채 상장의 내용물을 상상했다. 부피에 비해 묵직한 걸 보니 책인가? 어떤 책일까? 상상의 톱니바퀴는 매끄럽게 돌아가지 못했다. 그는 상상에 서툴렀다. 분석이라면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만.

  욕조에서 나온 뒤에서 그는 택배 상자를 뜯어보지 않았다. 라면을 끓여먹고 차까지 마셨다. 맛난 음식을 아껴 먹으려는 것처럼 결정적인 순간을 최대한 늦췄다. 아버지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인간이 있다. 가장 맛있는 것을 먼저 해치우는 인간과 맨 나중에 먹는 인간. 너는 가장 맛있는 것부터 해치우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 한계효용이 가장 클 때 가장 맛날 것 먹어야 해. 맛있는 것을 아낀답시고 맛없는 것만 꾸역꾸역 먹는 멍청이가 되면 안 돼. 아버지는 둘만 알고 셋은 몰랐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인간과 그가 있었다. 그는 가장 맛있는 것을 입에 대는 순간을 위해 마지막까지 굶었다. 그러니까, 한계효용을 한계까지 끌어 올렸다.

  그는 새로 장만한 잠옷으로 갈아입은 뒤 아껴두었단 샴페인까지 한잔 걸치고서야 택배 상자를 탁자로 옮겨왔다. 택배 상자를 느긋하게 들여다보던 그의 미간이 좁아졌다. 이상했다. 송장이 붙어 있지 않았다. 뜯어낸 흔적도 없었다. 매지펜으로 호수만 크게 적혀 있었다. 상자 옆면에 적힌 것과 같은 필체였다. 그는 어제 배달된 자신의 택배 상자를 가져와 대조해보았다. 필체가 달랐다. 경비의 필체가 아니었다. 불길한 기운이 명치끝에서부터 심장 쪽으로 빠르게 치고 올라왔다. 시한폭탄이라도 앞에 둔 것처럼 그는 진땀을 흘렸다. 아무래도 찜찜했다.

  본능은 어서 빨리 그 수상쩍은 물건을 돌려놓으라고 경고했지만 그는 자신도 모르게 테이프를 뜯어내고 있었다. 상자에는 검은 비닐봉지가 담겨 있었다. 비닐봉지 주둥이는 나일론 끈으로 묶인 채였다.

  그는 끈을 풀었다. 비닐봉지를 들여다보던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봉지에 담긴 것은 고양이였다. 옆집 고양이. 정확히 말하자면 옆집 고양이의 시체. 그의 손이 축축해졌다. 고양이는 입꼬리가 치켜 올라간 게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머릿속이 분주해졌다. 대체 누구 짓일까? 죽은 고양이를 보낸 이유가 뭘까? 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죽은 고양이를 주인에게 돌려주려는 행동에 담긴 어두운 의도 때문이었다. 옆집 여자에게 타격을 주려는 의도 말이다. 그것은 그가 이 상자를 발견했을 때 품었던 생각과 다르지 않았다.

  그는 상자를 덮고 테이프를 새로 붙였다. 실수로 109호의 택배 상자를 들고 왔을 때처럼. 돌려놓고 오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나아졌다. 당연히 그날 밤에는 고양이 울음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간만에 그는 푹 잘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그는 문제의 상자를 쇼핑백에 담았다. 상자에는 옆집 호시가 너무 크게 찍혀 있었다. 괜히 이목을 끌 필요는 없었다. 그는 식탁 위에 있던 적십자회비 고지서도 챙겼다. 오늘이 마감일이었다. 그는 적십자회비를 한 번도 빠뜨린 적이 없었다. 누가 뭐래도 그는 건실한 시민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순간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경비실에 경비가 버티고 앉아 있는 게 아닌가. 낭패였다. 내용물이 내용물인지라 상자를 갖고 있는 것조차 들키면 안 되었다. 경비실을 지나치는 순간, 쇼핑백을 든 그의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갓다.

  제자리에 갖다 놓지 못한 상자가 눈에 밟혀 그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물품 창고에 감취뒀지만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창고에서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았다. 퇴근 때까지 버텨야 한다는 사실이 더 견디기 힘들었다. 퇴근길에 몰래 돌려놓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기도 했다.

  그는 배가 아픈 척했다. 잠시 병원에 다녀오겠다며 자리를 떴다. 쇼핑백은 그새 더 묵직해진 듯했고 불쾌한 냄새도 나는 듯했다.

  그는 차를 몰고 우체국에 갔다. 가까운 편의점에서 일반 택배로 발송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확실한 배달을 원했다. 우체국 택배가 가장 믿음직스러웠다.

  그는 송장의 수신자 란에 옆집 주소를 적어 넣고 옆집 여자의 이름도 적었다. 옆집 여자의 이름을 거침없이 적는 자신이 놀라웠다. 그는 정신을 집중하고 기억을 더듬었다. 언젠가 자신의 우편함에 잘못 꽂힌 우편물에서 보았던 사실이 떠올랐다. 발신자 란에는 가짜 주소와 가공의 이름을 적었다. 애당초 그는 이 물건과 무관한 사람이었다. 그의 호기심 때문에 배달이 잠시 늦춰진 것뿐.

  상자에 담긴 게 뭡니까?

  그가 상자를 전자저울에 올려놓자 우체국 직원이 물었다.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고양이입니다.

  얼떨결에 나온 말이었다. 아차, 싶었지만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그는 손바닥을 바지에 문질렀다.

  설마 검은 고양이는 아니겠죠?

  우체국 직원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네.

  그가 미소를 쥐어짜내며 대꾸했다.

  월요일에나 배달될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가 힘겹게 중얼거렸다.

  신경쇠약으로 요절한 미국 작가에게 감사하며 그는 우체국을 나섰다. 적십자회비를 납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제 그의 단잠을 방해할 것은 없었다. 고양이를 해치운 장본인이 궁금했지만 중요한 것은 고양이가 더는 울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울지 못하는 고양이. 그걸로 족했다. 고양이가 울지 않으면 잠을 푹 잘 것이고 잠을 푹 자면 집중력이 떨어지는 일도 없을 것이고 집중력이 떨어지지 않으면 남의 집 택배를 들고 오는 실수 따위도 안녕이다. 남의 택배 상자에 생각이 미치자 그의 입가에 희미하게 걸려 있던 미소가 사라졌다. 더는 남의 택배 상자를 집어 올 수 없다니 슬퍼졌다.

  그는 수면양말을 신고 가습기를 켠 뒤 침대에 누웠다. 옆집 여자의 구두 소리에 눈을 뜰 때까지 한 번도 잠에서 깨지 않았다. 구두 소리가 반가울 지경이었다.

  다시 그를 찾아온 밤의 평화는 하루 만에 등을 돌리고 말았다. 이튿날이 정기 휴일이라 홀가분한 마음으로 눈을 붙였지만 도중에 깨고 말았다. 옆집의 소란 때문이었다. 격렬하게 다투는 소리가 벽을 날카롭게 두드려댔다. 악다구니를 쓰는 쪽은 여자였다. 사기꾼. 배신. 단물. 이런 말들이 유리처럼 부서졌다. 실제로 뭔가가 부서지기도 했다. 사내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트레이닝복일 터였다. 트레이닝복의 입에서 터져 나온 소리는 한결같았다.  씨팔. 가끔은 아이, 씨팔이라고도 했다. 다툼은 잦아드는가 싶더니 다시 거칠어졌다. 고양이 울음보다 더 시끄럽고 거슬렸다. 트레이닝복이 문을 쾅 닫고 나간 뒤에야 잠잠해졌다.

  그는 머리맡의 스탠드를 켜고 자명종을 확인했다. 새벽 2시였다. 아침에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뭔가를 도둑맞은 기분은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우유를 데워 마시고 다시 잠을 청했다.

  겨우 잠이 들 무렵 그는 다시 눈을 떴다. 옆집에서 우당탕,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자가 세간을 닥치는 해도 집어 던지고 있었다. 그는 소리만으로도 무엇이 부서지고 깨지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시계가 부서지고 접시가 깨졌다. 유리컵도 깨졌다. 부서지는 소리는 견딜 수 있었지만 깨지는 소리는 참기 힘들었다. 여자는 자꾸만 깨고, 깨고. 또 깼다. 그의 손이 축축해졌다. 발도 축축해졌다.

  그는 수면양말을 벗어던졌다. 발이 축축해진 것은 드문 일이었다. 여자는 세상의 모든 밤을 깨뜨릴 기세였다. 누군가는 여자를 막아야 했다. 고양이 시체가 담긴 상자를 여자 앞으로 부치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그는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그는 잔뜩 굳은 얼굴로 인터폰의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신호음이 한참 울린 뒤에야 그는 입을 열 수 있었다.

  지금이 몇 신 줄 아십니까?

  그는 정중히 물었다.

  여자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는 손바닥을 파자마에 닦았다.

  지금이 몇 신 줄 아시냐고요?

  그는 다시 정중히 물었다.

  개자식.

  여자가 싸늘한 목소리롤 뇌까렸다.

  그는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런 심한 욕설을 듣기는 난생처음이었다. 그가 들었던 최악의 욕은 아버지의 입에서 나왔던 축축한 놈, 이라는 비난이 고작이었다. 카운터펀치를 얻어맞은 복서처럼 숨이 멎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는 수화기를 꽉 움켜쥐었다.

  갑자기 여자가 울음을 터뜨렸다. 감정의 둑이 무너진 듯 여자는 서럽게 흐느꼈다. 여자는 오래오래 울었다. 여자의 울음은 수화기에서도, 벽 너머에서도 들려왔다.

  그는 여자가 울음을 그치고 말없이 전화를 끊은 뒤에야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여자의 손을 잡기라도 한 것처럼 손이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분노는 옛말이 되었다. 분노가 떠난 자리에는 회한이 밀려들었다. 여자에게 못할 짓을 저지른 기분이었다. 여자 앞에 무릎 꿇고 발을 어루만지고 싶었다. 여자의 집 앞에 놓여 있던 빈 그릇을 걷어찬 게, 고양이를 미워한 게, 시끄럽다고 전화한 게 후회스러웠다. 무엇보다 고양이 시체가 담긴 상자를 부친 게 마음에 걸렸다. 복수심에 눈이 멀어 그만......그래도 여자가 고양이의 시체를 보는 일만은 막아햐 했다. 더 이상 울지도 못하는 고양이 아닌가.

 

  그는 아침을 먹자마자 아파트 건물 입구가 마주 보이는 자리로 차를 옮긴 뒤 운전석에 눌러 앉았다. 우체국 차량이 언제 들이닥칠지 알 수 없었다. 졸음을 몰아내기 위해 보온병에 담아온 커피를 거푸 들이켰다. 점심은 역시 집에서 챙겨 온 빵과 우유로 때웠다. 잠시도 자리를 비울 수 없었다. 오줌조차 빈 생수병에 해결했다. 잠복근무 중인 형사라도 된 기분이었다.

  잠복 중인 그를 괴롭힌 것은 졸음이나 요의가 아니라 불쑥불쑥 떠오르는 자괴감이었다. 내가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옆집 여자가 고양이 시체를 보든 말든 자신과는 상관없다 일이었다. 그는 맥이 풀리고 속이 상햇다. 옆집 여자가 수고를 알아줄 리 만무하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래도 그는 자리를 뜨지 않았다. 내친걸음이었고 기왕의 수고를 헛되게 할 수는 없었다. 괜한 오기도 생겼다.

  그는 옆집 여자가 집을 비우기를 바랐다. 그래야 우체부가 택비를 경비실에 맡길 것이고 그쪽이 일을 처리하기 수월할 터였다. 경비가 자리를 비운 뜸을 타 쓸쩍할 수도 있을 테고 경비가 자리를 지키더라도 실수를 가장해 들고 갈 수도 있을 테니. 우체부가 직접 올라가면 골치 아플 것이었다. 그런데 옆집 여자는 집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우체국 차량이 나타난 것은 오후 4시 반경이었고 그는 잠복한 지 여덟 시간 만이었다. 우체국 차량이 눈에 들어오자 가슴이 세차게 방망이질했다. 그는 경비실 쪽을 확인했다. 내내 자리를 지키고 있던 경비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를 착용한 뒤 차에서 내렸다. 

  우체국 차량이 그의 동 앞에 멈춰 서고 우체부가 운전석에서 내렸다. 날렵하고 다부진 인상이었다. 우체부는 재빠른 동작으로 차 뒤쪽으로 돌아가 짐칸에서 상자를 꺼냈다. 그가 부친 상자였다. 고양이 시체가 담긴 상자.

  우체부는 곧장 아파트 입구로 향했다. 그는 발소리를 죽이며 뒤를 따랐다. 손이 축축해졌다. 어떻게든 우체부를 막아야 했다.

  우체부는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 언제나처럼 엘리베이터는 15층에 머물러 있었다. 우체부는 주저 없이 비상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도 뒤를 따랐다. 우체부는 계단을 빠르게 올랐다. 그도 처지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우체부를 놓치면 끝장이었다. 그는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며 우체부의 뒤를 바짝 쫓았다.

  그에게 기회가 찾아온 것은 6층 계단참에서였다. 휴대폰이 울렸고 우체부가 거짓말처럼 걸음을 멈추고 상자를 내려놓았다. 우체부가 점퍼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든 순간 그는 상자를 냉큼 집어 들도 6층 복도로 내달렸다.

  야! 거기 안 서.

  등 뒤에서 고함이 들려왔다. 그는 반대쪽 비상계단을 향해 달렸다. 엘리베이터는 1층에 내려가 있었다. 그는 사력을 다해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우체부가 그를 따라잡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가 느린 게 아니라 우체부가 너무 빨랐다. 5층과 4층 사이의 층계에서 우체부가 그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그 서슬에 그의 몸이 빙글 돌아갔다.

  내놔.

  우체부가 상자를 뺏으려 하자 그는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상자가 뜯겨져나갈 것 같았다. 그는 손아귀에 더욱 힘을 주고 상자를 좌우로 흔들어댔다. 우체부의 상체가 함께 요동쳤다. 우체부는 가벼웠다. 우체부가 상자를 놓치는 바람에 상자가 허공으로 날아갔다. 벽에 부딪힌 상자는 계단으로 떨어져 굴렀다. 우체부가 계단 난간을 짚고 몸을 내밀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도 상자의 행방을 눈으로 좇았다. 상자는 4층 복도 입구까지 굴러 내려갔다.

  너, 대체 뭐 하는 놈이야?

  우체부가 그의 멱살을 움켜쥐고 소리쳤다.

  그의 숨이 막혔다. 위에서 짓누르는 우체부의 서슬이 퍼랬다. 그의 상체가 난간 너머로 휘청 꺾였다. 일단 숨통을 터야 했다. 그는 우체부의 허리춤을 잡아했다. 우체부의 몸이 기우뚱 하면서 그의 다리에 걸리고 말았다. 우체부는 중심을 잃고 구르다가 계단참 구석에 처박혔다. 우체부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비명을 지른 쪽은 그였다.

  우체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목이 꺽인 듯했다. 설마. 그는 더럭 겁에 질려 자신도 모르게 목을 매만졌다. 우체부는 꿈쩍도 안 했다. 죽은 것 같았다. 그는 부들부들 떨었다. 머릿속은 하얗고 눈앞은 캄캄했다.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진짜로 무너지는 것은 그의 의식이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집에 돌아와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믿을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이해할 수도 없었다. 심장이 여태 벌렁거렸다. 심장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죄다 알고 있었다. 심장은 블랙박스였다. 그는 심장을 꺼내서 좀 전의 상황을 재생시켜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왜 우체부를 뒤쫓았지? 그제서야 고양이의 시체가 담긴 상자가 떠올랐다.

  그는 뭔가에 홀린 듯 밖으로 뛰쳐나갔다. 상자를 치워야 했다. 고양이 시체만 치우면 모든 게 제대로 굴러갈 것 같았다. 그는 4층으로 내려간 뒤 상자가 굴러 떨어진 장소로 갔다. 상자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출구 윗벽에 적힌 층수를 확인했다. 틀림없이 그 자리였다. 누가 가져간 걸까? 조금 전 일은 모두 헛것이었을까? 과민해진 신경이 빚어낸 악몽이었을까? 바로 위 층계참에 쓰러져 있는 우체부를 본 순간 그의 희망은 꺾이고 말았다.

  집에 돌아온 그는 신고를 할지 말지 고민했다. 우체부가 죽었다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병원에 제때 도착하면 목숨을 건질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미 죽었다면? 긁어 부스럼이었다. 그가 그가 고민하는 사이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창으로 밖을 내려다보았다. 구급차가 아니라 경찰차였다. 우체부는 죽은 게 분명했다. 이제 그는 자수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자수하면 얼마나 감형을 받을 수 있을까?

  그는 과실치사의 형량을 인터넷으로 검색해보았다. 2년 이하의 금고 또는 7백만 원 이하의 벌금. 사람 목숨 값은 의외러 헐했다. 다섯 달 뒤 만기인 적금을 헐면 4백만 원은 마련할 수 있었다. 몰고 있는 차가 오래되긴 했지만 2백만 원은 가능할 터였다. 그는 중고차 사이트에 접속해 시세를 알아보았다. 모델명, 연식, 주행거리를 입력했더니 120만 원이라는 결과가 떴다.

  날강도들!

  그가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버럭 소리쳤다.

 

  경찰이 집으로 찾아온 것은 다음 날 저녁이었다. 그가 부른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그는 자수를 망설이고 있었다. 2년의 금고나 7백만 원의 벌금은 겁나지 않았다. 축축한 놈, 이라는 아버지의 힐난이 두려웠다. 우체부의 얼굴은 가물가물했지만 드잡이할 때 외쳤던 말은 쟁쟁했다. 너, 대체 뭐 하는 놈이야? 아버지 말이 맞았다. 그는 축축한 놈이었다.

  문밖에 서 있는 사람이 경찰이라고 하자 그의 손이 축축해졌다.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그것도 예상보다 빨리. 곧장 자수했어야 했다. 그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문을 열었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모든 것을 털어놓아야 했다.

  고양이를 죽였습니까?

  경찰이 현관에 버티고 선 채 물었다.

  네?

  옆집 고양이를 죽였습니까?

  아니요.

  고양이 울음 때문에 옆집에 항의하신 적 있죠?

  네.

  정말 죽이지 않았습니까?

  네.

  경찰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경찰의 눈이 거짓말탐지기처럼 보였다. 그는 경찰의 눈을 피할 수 없었다. 경찰은 수사에 나서게 된 경위를 설명하며 주위를 둘러보앗다,

  땀이 많으신가 봅니다?

  경찰이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네?

  우리도 저걸 애용하거든요.

  경찰이 신발장 위에 놓인 스프레이를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땀냄새 제거용 스프레이. 실수로 들고 온 택배 상자에 들어 있던 물건.

  제가 좀, 축축해서요.

  그가 머리를 긁적이면 말했다.

  경찰은 협조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고 물러갔다. 문을 닫으며 그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고양이 건에 관해서라면 그는 결백했다. 하지만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 고양이의 시체가 옆집 여자에게 전해지고 만 것이다. 이제 그에게는 또 다른 걱정거리가 생겼다. 고양이 시체가 담긴 상자를 부친 게 탄로 날 수도 있었다. 고양이를 죽이지 않았다는 것을 밝히려면 상자를 몰래 가져왔다는 사실을 실토해야 했다. 그동안 택배 상자를 훔쳐왔다는 사실까지 까발려질지 몰라싿.

  그는 인터넷으로 절도죄의 형량을 찾아보았다. 단순절도는 6년 이하의 징역이나 천만 원 이하의 벌금이었다. 과실치사보다 엄했다. 게다가 그는 상습범이었다. 그는 아파트 단지 지도를 펴보았다. 가위표는 모두 아홉 개였다. 정상참작의 여지는 없었다. 고양이를 죽인 죄까지 덤터기를 쓰게 될 수도 있었다. 그는 반려동물 살해죄의 형량도 뒤져보았다. 동물보호법 위반으로 5백만 원 이하의 벌금을 물어야 했고 재물 손괴죄에 따른 3년 이하의징역이나 7백만원 이하의 벌금을 감수해야 했다. 세 가지 죄에 대한 벌을 모두 합치면 인생은 끝장이었다. 자수한다면? 이러나저러나 축축한 인생이 될 게 뻔했다. 그는 혀를 깨물고 싶은 심정이었다.

  뉴스를 검색하던 그는 우체부에 관한 소식을 찾아냈다. 어제 오후 서울의 모 아파트 계단에서 우체부가 쓰러진 채 발견되어 병원으로 실려갔으나 여태 의식불명이었다. 경찰은 과로에 의한 실족에 무게를 뒀다. 우체부의 목숨이 붙어 있다는 사실에 그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날 밤 옆집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쥐죽은 듯 조용했다. 새벽 5시면 어김없이 들리던 구두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문 앞에 나와 있던 빈 그릇도 보이지 않았다. 우체부는 여전히 혼수상태였다.

  그는 인터폰으로 경비실에 전화했다.

  709홉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옆집이 조용해서요.

  그런데요?

  옆집이 너무 조용합니다.

  그게 문제라도 됩니까?

  아닙니다.

  그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밖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린 것은 그가 수화기를 다시 집어 들고 옆집 번호를 누를지 말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그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베란다로 나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화단에 누군가 엎어져 있었다. 핑크색 트레이닝복, 늘씬한 뒤태. 옆집 여자였다. 사람들이 하나둘 여자 주위로 모여들었다. 경비도 보였다. 경비가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다른 사람들도 고개를 들었다. 그는 황급히 몸을 숨겼다.

  한참 뒤 그는 다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사람들은 여전히 여자를 둘러싼 채 웅성거리고 있었다. 어디론가 전화를 거는 사람도 있었다. 위를 올려다보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여자의 옆 얼굴을 찬찬히 내려다보았다. 옆집 여자의 얼굴은 처음이었다. 손이 축축해졌다. 소파도, 탁자도, 침대도, 옷장도, 신발도, 컴퓨터도, 접시도. 형광등도 축축해졌다. 그는 땀냄세 제거용 스프레이를 손바닥에 뿌렸다. 소파에도, 탁자에소, 침대에도, 옷장에도, 신발에도, 컴퓨터에도, 접시에도, 형광등에도 뿌렸다. 라벤더 향이 진동했다. 109호의 겨드랑이에서 나야 했을 향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