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랑은 첫 사랑이다

공지영

Artwork by Lee Wan Xiang

이를테면 사랑은 그렇게 온다.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면 날마 다 바라보던 그 낯익은 풍경을 오래 바라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면서, 흐린아침, 가까운 산이 부드러운 회색 구름에 휩싸이고 그 낯익은 풍경이 어쩐지 살아 있었던 날들보다 더 오래된 기억처럼 흐릿할 때, 그때 길거리에서 만났더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쳐버렸을 한 타인의 영상이 불쑥 자신의 인생 속으로 걸어 들어오는 것을 느낄때......그느낌이 하도 홀연해서 머리를 작게 흔들어야 그 영상을 지워버릴 수 있는 그때.

만일 그것이 첫 번째 사랑이라면, 첫 번째가 아닌 사랑이 도대 체 세상에 있을까마는, 네가 마지막 사람이어야만 한다고 확신하지 않는 연인이 이 세상에 도무지 존재할까마는, 마치 미끄럼틀을 타고 있는 것처럼 한 발자국 내딛는 순간 그 끝에 도달해버리는 것이다.

먼옛날,아주 작은 수의 사람들만이 이 세상에 살고 있을때, 인간이 거대한 자연을 경외하고 가만히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 그 대가로 예지력을 가지고 있었을 때 인간들은 아무도 사랑을 시작하지 않았다. 사랑의 대가로 치러야 할 일이 너무 많은  것을 알았던 것이다.나무 열매를 따고 물고기를 잡고 꽃을 머리에 꽂는 일의 수만 배의 에너지를 써서 사랑이라는 걸 하기에는 그들은 너무 피곤했기 때문이다. 단 몇 초간의 성적인 쾌락을 얻 는 것으로 만족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대가들을 치러야 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섹스조차 기피하기 시작했다. 출산과 수유 그리고 양육을 위한 여분의 노동....... 그래서 지상에 살아 있는 인간들의 수가 줄어가기 시작했다.

걱정이 된 신은 다른 종류의 인간들을 만들 수 밖에 없었다. 유전자의 일부분에 장밋빛을 칠해놓은 것이다. 일단 그 유전자가 활 동하기 시작하면 물고기를 잡거나 나무 열매를 따거나 심지어 출산의 극악한 고통까지도 아름답게 채색되었다. 하지만 신도 힘이 들었는지 그 기간을 길게 채색해주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신은 합리적인 존재여서 종족의 번식이 우선 필요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인간을 신처럼 행복하게 만들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신이 인간을 미워해서가 아니라 그저 신의 한계였다. 그리하여 인간은 그 채색된 유전자의 장난으로 한평생 마음의 고통까지 져야 하는 운명을 타고난 것이다.

정인이 눈을 뜬 어느 초여름 비 내리는 아침도 그랬다.

세수를 하고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면서 정인은 산을 올려다보았다. 윗봉우리가 구름에 엷게 가린 산은 신비로워 보였다. 늘 바라보고 지나쳤으며 어린 시절에는 길도 아닌 곳까지 쏘다니던 그 산이 바로 저 산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던 것이다. 아마도 현준의 차를 타고 서울이라는 곳에 처음으로 가서 생전처음 보는 음식을 먹었던 그 주말이 지난 다음이었을 것이다.마을 뒤에나 있는 산을 처음으로 신비하다고 생각하면서 정인은 문득 현준의 얼굴을 떠올렸고 가슴 맨 밑바닥에서 울리는 둔중한 소리를 들었다.

그러고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길거리에는 그를 닮은 사람들이 갑자기 늘어나기 시작했고 우체국으로 걸려오는 그 많 은 전화벨 소리들이 가슴을 예리하게 가르며 울리기 시작한 것이다. 소포를 부치거나 등기를 접수할때 강,자나 현,자나 준,자라는 글씨가 적혀 있으면 그가 떠올랐다.

그날 이후,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아버지와 정희 언니가 내려왔 지만 정인으로서는 힘겨운 의식들을 치러내야 했던 시간들이 지 나갔다. 현준은 그럴 때마다 옆집에 살았던 한 남자의 예의만큼만 거리를 두고, 그러나 정인에게는 살붙이보다 가까이 다가오기 시 작했다. 현준은 우체국으로 자주 전화를 걸었고 한번은 우체국 주소로 소포가 오기도 했다. 그 소포 속에는 작은 향수가 들어 있었는데 정인이 태어나서 그렇게 어여쁜 것을 가져 보기는 처음이었다. 예전에는 우체국 일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면 제방에 들어가 책을 보거나, 책도 손에 잡히지 않는 날에는 할머니가 살아 계실 때 가르쳐준 화투패를 떠보며 내일은 오늘과 다르기를 빌었지만 이제 그럴 필요가 없었다.마치 마술사가 짠,하고 마법을 건 것처럼 모든 것이 새롭게 채색되어 제 빛깔로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사물들이 그렇게 다양한 제색깔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처음 안 일이었다. 강한 인상을 가졌던 정인의 얼굴은 부드러워졌고 뺨은 팽팽해지고 윤기 있어졌으며 늘 아래로 처져 있던 입술 끝은 살짝 위로 치켜져서 얼굴 전체가 동그스름한 인상마저 주게 되었다. 사람들은 처음으로 저 처녀가 참 귀염성이 있구나 하는 걸 발견하기 시작했다. 정인은 이제 막 피어나려고 하 는 목련꽃 봉오리처럼 순결하고 힘찼으며 그러면서 부드러웠다.

 

*

 

책을 읽다 말고 정인은 현준을 생각한다. 그와 함께 먹었던 저녁 식사.포크와나이프쓰는법을가르쳐주던그.그화려한레스토 랑에서 정인은 긴장감 때문에 겨드랑이 밑으로 식은땀이 뚝뚝 흘 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새로 빨아 다림질해서 입고 간 투피스가 왜 그렇게 구질구질하게 느껴졌을까....... 그래도 그때의 느낌은 지금과는 달랐다. 왜냐하면 현준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 이다.

그는 숨기려고 하지 않았다. 경계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아니 그반대로자신을더드러내려했으며정인이더많은것을물어 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차를 타다가 스커트가 문에 끼었 을 때 그것을 빼주려고 현준은 운전석에 앉아 정인의 좌석 쪽으로 몸을 기댔었다. 그때 느껴지던 그의 육체가 그리워지자 정인은 갑자기 그가 보고 싶었다. 내일 우체국에나 가면 전화를 해 보고 싶었다. 그냥 걸었어요...... 하면 그는 알아차릴 것이다. 자신이 그를 그리워했다는 것을....... 그럴 때 흰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기뻐하 는 그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작은 방구석에 앉아 되도록 숨소리도 크게 내지 않으려 애쓰면 서 정인은 처음으로 생각해본다. 그 사람을 사, 랑, 하게 되었구나 하고....... 그러자 설탕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박하사탕을 입에 문 것처럼 쓰라린 환희가 그녀의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음날새벽,미송은새벽첫차를타고서울로떠나고정인은 연주에게 아침상을 차려준 후, 출근을 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어제는 비가 내릴 것만 같았는데 오늘은 아침부터 청명한 초여름의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정인은 오늘은 우체국에 나가 하루 종일 현준의 전화를 기다릴 것이라는 예감을 했다. 왜냐하면 정인은 그를 사랑하기로 작정했 기때문이다.아침,미송이데려다놓은정체모를여자를집에남 겨놓고 걸어가는 그 정인에게 다가가 물었다면, 작정을 하다니요? 반문하겠지만 그건 그랬다. 진실은 때로 자신을 속이며 다가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진실이니까.

그래서 정인이 눈을 들어 베이지색 포니 엑셀 자동차를 발견했 을때정인은잠시제눈을의심했다.이아침,골목길에세워놓은 저 차는 현준의 것이기 때문이다.

현준은 자동차 안에서 선글라스를 낀 채 잠들어 있었다. 정인이 다가가 갸웃이 유리창 안을 들여다보았을 때 엷게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어.......”

햇살 때문이었을까, 현준이 눈살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그러고는 그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피어난다.

“어쩐 일이세요?”

현준은 선글라스를 벗더니 눈가를 비비며 정인을 향해 웃고만 있었다.

“타요. 정인 씨 납치하려고 새벽에 서울서 출발했어요.”

정인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차에 올라탔다. 그때 그녀는 마음이 외치는 환희의 소리를 들었다. 저를 어딘가 먼 곳으로 데려가주시 겠어요! 하지만 차에 올라탄 정인은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겨우 말한다.

“저 출근하는 길인데요.......”

“알아요. 하지만 오늘은 나를 위해서 시간을 좀 내주세요. 주말 까지 기다리기가 너무 힘들었어요. 난 지금 빈털터리거든요.”

“네?”

“어젯밤에 친구 놈들이랑 포커 하다가 다 날렸어요. 배도 고파 죽겠구.”

현준은 배를 쓸어내리며 소년처럼 웃었다. 배고프다는 말처럼 이 여자에게 호소력을 가지도록 훈련되어진 낱말이 있을까.......

정인은 갑자기 그가 가여워진다.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보였던 이 남자에게 밥을 사줄 수 있다니. 하지만 정인은 근검이 몸에 밴 처녀였고 따라서 핸드백 속엔 겨우 천 원짜리 한 장이 들어 있을뿐이었다.

“저 제가 집에 잠시 다녀오면...... 사실은 지금 돈이.......”

현준은 귀여워 못 견디겠다는 얼굴로 정인을 바라보며 큰 소리 로 웃는다. 정인의 귓불이 확 달아올랐다.

“제가 꾸어드릴게요.”

“안 돼요....... 그건...... 제가 사드려야...... 여기까지 오셨는 데.......”

하지만 현준은 차를 출발시켰다. 그러고는 읍내와는 반대 방향 으로 차를 몰았다. 모내기를 마친 논들에 맑은 물들이 찰랑거리고 그물에발목을담근아기벼들이총총히서있는시골길을현준 의 차는 달려가기 시작했다.

우체국 일이 새삼 걱정스러웠지만 정인이 읽은 모든 소설책과 수필집에서 바로 이런 것을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모든 걸 희생하는 것, 그래도 아깝거나 계산하지 않는 것, 불리 한 줄 알지만 달려 가는 것, 달려가서 그의 존재와 나의 존재가 만나는 것 이외에 이 세상에 어떤 중요한 일도 존재하지 않는 것.......정인은 그제야 제 어깨가 옹송그려졌던 것을 깨닫는다. 어깨의 긴장을 풀 자 바람이 그녀의 머리칼을 날리기 시작했고 그 여자는 새삼 현준 의 옆모습을 바라본다.

밤새 자란 수염이 귀밑에서부터 턱선까지 파르스름하게 어두운 윤곽을 그리고 있었다. 그 윤곽의 파르스름함이 정인은 가슴이 아프다. 저 어두운 수염 자국에 부드러운 흰 거품을 바르고 푸르른 면도칼로 사각사각 그의 턱을 면도해 주고 싶은 욕망이 불현듯 솟구쳐서 정인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현준의 차는 한 시간 남짓을 달려 계룡산 입구에 도착했다. 아직 아침 시간이어서 그런지 유원지 입구는 한산했다. 현준은 익숙한 길인지 유원지 입구에서 모퉁이를 돌아 차 한 대가 겨우 들어갈까 말까 한, 좁은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깨끗한 한옥이 나타났다.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줄래요?”

현준은 정인을 차에 남겨놓은 채 안으로 들어갔다. 정인은 약간 의 두려움과 호기심을 가지고 주변을 둘러본다. 집 뒤로 대나무 숲이 연한 잎새를 뻗어내고 있고 개울물이 저만치서 흐르고 있었 다. 오래되었지만 정갈한 집이었다. 오래전에 정인의 집에서 키우던 누렁이를 닮은 개가 정인이나 현준이 타고 온 차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천천히 집 앞을 걸어가다가 나무 그늘에 누워 하품을 하며 뒷발로 귓가를 발발발 긁어댄다. 낯설지 않은 풍경이었다.

하지만 그때 정인의 발치에 이상한 감촉이 느껴졌고 정인은 문 득아래쪽을바라본다.구두뒤꿈치로무엇을밟고있는듯한느 낌이 들었던 것이다. 바라보니 연분홍색 손수건이었다. 아마도 누군가가 떨어뜨린지 오래된 것인지 시트 밑에 끼여 있던 손수건....... 연분홍색을 이미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의 발길에 밟힌 듯한 손수건을 정인은 힘겹게 꺼내 들여다본다.

“정인 씨! 이리 와보세요!”

현준이 집 안에서 나오며 정인에게 소리쳤다. 정인은 손에 들고 있던 더러워진 손수건을 얼른 내려놓는다. 그러고는 차 문을 열다 말고 현준이 눈치채지 않도록 그것을 다시 아까처럼 시트 밑에 던져 넣었다. 웬일인지 그것을 발견했다는 말을 현준에게 하면 안 될 것 같아서였다.

“우리 집이에요. 예전에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작은 마나님이 사셨던 집이라는데 지금은 명색상 제 집이죠. 정인 씨랑 이곳에 꼭 한번 와보고 싶었어요.”

집 안으로 들어서는 정인의 한쪽 어깨를 감싸며 현준은 말을 시작했다. 작은 마나님이라는 말을 할 때 그의 얼굴에 스치는 작은 경련을 정인은 보지 못한다. 살이 디룩하게 찐 처녀 아이가 부엌문 을 반쯤 열고 정인을 바라보고 있다가 정인과 눈이 마주치자 입술 을 삐죽이며 얼른 문을 닫아버렸다.

“말순이라고 여기서 심부름을 하고 있죠. 벙어리예요.”

현준은 정인을 뒤뜰로 데리고 간다. 이제 막 퍼지기 시작한 아침 햇살이 빽빽한 대나무 숲에 상큼한 그늘을 만들기 시작했다.

현준은 정인을 두고 성큼성큼 걸어가 우물 뚜껑을 열었다. “벌써 덥네....... 손 씻을래요?”

현준은 두레박을 내리며 물었다. 정인의 귓가로 작은 소름이 지나간다. 그래, 이런 일이 있었다. 현준은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 것 일까....... 마치 그날처럼 어디선가 까마귀가 울며 날아가는 것만 같은 이상한 예감을 정인은 느낀다.

“아니에요. 됐어요.......”

정인은 10년 전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우물 속에 고개를 박았다. 쌉싸름한 이끼 냄새가 풍겨온다.이고요......이 고요까지 낯이 익었다. 두레박 때문에 작게 파문이 이는 우물물 속에 정인의 얼굴이 비치고 그 곁으로 한 얼굴이 다가온다. 두레박은 물속에 들어가 몇 번 흔들거리다가 첨벙 하고 제 몸을 거기에 적신다.

“저기요.”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끼며 정인은 다가오는 현준의 얼굴을 밀어내듯이 성급하게 입을 열었다. 현준의 얼굴이, 이제껏 정인에게는 한 번도 보여 주지 않았던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가 얼른 제자리로 돌아왔다. 정인은 자신도 모르게 현준에게서 한 발자국 물러 섰다.

“저기,옛날에제가어렸을때그쪽집뒷마당에서제게물을한 두레박 퍼주셨던 것 기억나세요?”

“물을요? ......글쎄.......”

“그랬어요....... 아마 10년 전쯤에.......”

정인은 그날이 현국의 처 은주의 진오귀를 하는 날이었다는 말을 꺼내지 않는다. 왠지 그 말이 현준의 상처를 건드리게 하는 말이 될까 봐였다. 그러나 가슴은 이상하도록 부풀어 올랐다. 운명이라는 건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인지 모른다. 그날, 이렇게 생긴 우물가에서 자신은 이미 현준과 사랑에 빠지도록 예정되어 있었던 것 은 아닐까, 하고.......

두 사람은 말없이 대숲 어귀의 돌 틈에 앉았다. 먼지가 잔뜩 낀 장독대가몇개서있다.침묵하는두사람의사이로새소리가들 려오고 어디선가 멀리 개 짖는 소리...... 대나무 숲에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 이윽고 그 소리들이 잦아들자 현준의 숨소리가 들 려왔다.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그 숨소리.

정인은 그 숨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안다. 그것은 아마도 사 랑하는 여자를 곁에 둔 남자의 숨소리이리라. 아마도 그녀를 안고 싶어 하는 소리...... 정인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하지만 이상하게 정인의 가슴은 하나도 두근거리지 않았다. 그것이 정인에게는 현준에게 미안한 듯이 생각되었다. 밤새 자신을 보기 위해 차를 몰고 온 사람, 자신 하나를 바라보고 그는 어둠 속을 달려온 것이다. 그런데......이 모든 것을 이해한다 해도 이 침묵이, 이 가까운 거리가 정인에게는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낯설음 속에는 불길한 예감도 얼핏 섞여 있었다. 저항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침묵과 필사적인 싸움을 벌이는 듯한 힘겨움 속에서 정인이 얼핏 현준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현준의 한 팔이 정인의 목덜미를 뒤쪽에서 감싸 안았고 현준의 입술이 정인에게 한순간 다가와 겹쳐졌다.

정인은 어린 시절에 솔개를 본 적이 있었다. 공중을 선회하다가 쏜살같이 강하하여 병아리를 낚아채던 솔개...... 공중으로 번쩍 들어 올려지면서 순종하는 듯이 보이던 노란 병아리...... 내가 지 금 채이고 있구나 하는 걸 느낄 수도 없을 그찰나.

어떻게인간과인간이입을맞추고혀를교환하며침을섞을수 가 있는지 정인은 소설을 볼 때마다 의아해하곤 했었다. 하지만 이 를 악물고 저항을 해도 현준의 혀는 밀려들어온다. 밀려들어와서 정인의 붉은 잇몸을 핥아내고 있는 것이다. 정인은 얼결에 그 입술 을 방치하고 있다가 현준을 떼밀어냈다.

다시 무거운 침묵이, 하지만 아까보다는 조금 헐거운 침묵이 정인과 현준을 감쌌다. 정인은 감히 현준 쪽을 보지는 못 한 채 손가락으로 입술을 닦아낸다. 자꾸만 닦아낸다. 그러다가 정인이 팔을 툭 떨어뜨린 채, 가만히 숨을 내쉬었다. 어디선가 작은 새가 삐우욱, 하고 운다. 정인은 아직도 현준을 바라보지 못 하는데 길고 숱이 많은 속눈썹에 눈물이 그렁하니 맺힌다.

“전 이런 거...... 처음이에요.”

이런 말이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줄 알았지만 하고 만다. 그것이 정인에게는 중요했기 때문이다. 현준은 아무 대답이 없다. 정인은 쭈그리고 앉은 채 스커트 자락을 무릎 아래로 자꾸 내렸다. 작은 새가 또, 삐우욱 하고 운다.

“대학 다닐 때...... 사랑해보셨어요?”

정인은 순하게 물었다. 현준의 얼굴로 비웃음이 휘익 지나간다. “......모르겠어요....... 아무도 내 마음에 진짜로 들어오지는 못했어요.”

현준의 목소리는 낮고 힘이 없었지만 진실처럼 들렸다. 정인의 고개가 처음으로 현준을 향해 돌려졌다. 현준의 옆모습은 쓸쓸해 보였다.

“만나서 떠들고 차를 마시고 같이 밥을 먹은 여자들이야 많았죠. 같이......잠을 잔 여자들도 많았어요. 하지만 한 번도 그 여자들이 내게 진정으로 들어온 적은 없었어요.”

같이 잠을 잤다는 말에서 정인은 자신도 모르게 스커트 자락을 얼핏 움켜쥐었다. 하지만 먼 곳을 바라보는 현준의 얼굴은 금방 울 음이라도 터질 듯이 보였다. 정인은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 였다. 이해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그래야만 어른이 되는 것만 같았던 것이다. 하지만 가슴 한구석으로 쓰라린 물줄기가 지나간다. 여자들하고 잠을 잤다...... 잤다...... 하지만....... 하지만 새벽에 보고 싶어서, 오직 그 여자의 얼굴이 보고 싶어서 운전을 하고 두어 시간길을 내려 오신 일은요? 하고 묻고 싶었지만 정인은 입을 다문다.

“배고프시다고 했죠?”

두 손으로 제 마음의 어떤 물줄기를 밀어내는 듯 한 몸짓을 지으며 정인은 자리에서 일어난다. 모든 갈망은 헛된 것이었구나....... 정인은 애써 웃었다. 현준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정인의 곁에 선다.

‘어서 이 자리를 떠나야지...... 그는 내게 아무것도 아니다...... 수많았다는 그 여자들이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듯이.......’

하지만 정인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한 채 서 있었고 현준은 이번에는 다가와 정인을 끌어안고 다시 한 번 입을 맞추었다. 뜨거운 입술이었다. 저항하려고 생각하면서도 정인은 마치 뜨거운 욕조에 몸을 담근 것처럼 꼼짝하지 못한다. 현준의 한 손이 정인의 등줄기를 따라 내리다가 가슴을 어루만지기 시작한다. 정인은 처음으로 제몸이 반응하는 어떤 이상한 치밀어 오름을 느낀다. 온몸이, 만일 꽃이라고 비유할 수 있다면 활짝 열려 버릴 것 같은 두려움...... 만일 활짝 피어나는 꽃봉오리 위로 이슬이 내린다면 이 슬을 머금을 것이고 황사 바람이 분다면 싯누런 먼지를 흉하게 덮 어쓸것같은,비가내린다면비를머금을것만같은예감.......

작은 바람에도 파들거리는 대숲 잎새가 지워지고 대숲 너머 걸려 있는 초여름의 짙푸른하늘, 엷게 떠 있는 아기구름 한 조각...... 어떻게 여기까지 왔나...... 하는 생각이 아득하게 정인의 머리를 스쳐갔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구름처럼 흩어지고 정인은 눈을 감는다.

‘제가 사랑하면 안 될까요....... 제가 헛되지 않게 해드리면 안 될까요? ......제가 따듯하게, 제가 당신의 마음속에 들어가서 다 시는 바람처럼 흩어지지 않도록 제가 사랑을 드린다면.......’

스물한 살짜리 정인을 어리석다고, 경솔하다고 당신들은 생각 하는가? 아마도 그런 생각을 하는 당신들은 참으로 행복한 삶 을 살았을 것이다. 비꼬는 의미라곤 조금도 없이 행복하고 현명하 며 지혜로운 선택만을 해왔을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들은 감히 행 복하다고 할 수 있다. 만일 그것이 불행이었다고 생각하지만 않는 다면....... 그런데 그날 이 오정인이라는 우체국에 근무하는 시골 처녀는 이런 생각을 했던 것이다. 이것은 바로 나의 선택이다, 하고.......

키스는 거기서 끝났다. 정인과 현준은 점심을 먹고 오후 늦게 그 집을 나선다. 순결에 관해 관심이 많은 사람들을 위해 덧붙여두자 면 정인은 그날 소위 그 순결이라는 것을 잃지는 않았다. 하지만 정인은 그날 오후 내내 서울에서 무기정학을 맞고 내려온 명수가 우체국 앞 다방에서 자신을 기다린다는 것을 까맣게 몰랐을 뿐이 었다.



Click here to read an excerpt of Gong Ji Young’s A Tall, Blue Ladder, translated by An Seon Jae, from our Spring 2022 iss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