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시 4편

이영주

엄마의 과일청

문을 열어놓아도 당신은 나올 줄을 모릅니다. 달큰한 과육을 꾹꾹 눌러놓은 돌처럼. 부드럽고 향기로운 살들이 모두 녹아 없어질 때까지. 오랫동안 긴 젓가락을 넣어 저어 보았지요. 함께 나갈까요, 끝나지 않는 질문을 흘리면서. 이곳의 모든 것은 아무것도 부패하지 않고 고스란히 네 입으로 흘러갈 거란다. 당신은 병 속에서 자신의 손발을 꾹꾹 누르고 있습니다. 차곡차곡 쌓여서 썩지 않는 사람으로 만들어주고 싶어 합니다. 울고 있는 순간에도 달짝지근한 눈물이 쏟아져 병 속의 당신이 핥을 수 있기를, 죽은 후에도 찻물을 부으면 다시 살점이 단단해지기를, 심장을 누르는 돌 . . . . . . 뚜껑을 열어 놓아도 당신은 나갈 수가 없습니다. 나는 함께 나가자고 병의 입구에 바람을 불어넣었습니다. 아름다운 악취가 흘러나왔죠. 슬픔의 냄새란 병 속의 바람에서 퍼져가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신은 없어진 손발 대신 몸통으로 과육들을 빨아들이고 있네요. 나의 영혼에서 흘러나간 이 바람은 무엇인가요. 급속도로 모든 것이 썩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은 앉은뱅이처럼 병 속에서 일어날 줄을 모릅니다. 이곳에서 시작된 어지러운 바람. 스무 살에 살던 방이었습니다. 나뒹구는 모든 병들이 썩고 있었습니다.





성인식

저는 문 뒤에 있었어요. 박쥐처럼 거꾸로 매달려 있었죠. 오줌 줄기가 가느다랗게 새어 나오는 신부님의 다리에 얼굴을 묻고 싶었답니다. 모든 역사는 말하는 순간 거짓이 되어 버리는 걸까요. 심장만 도려낸 어린아이들을 피라미드 밑으로 던져 버렸다는 어떤 꼭대기도 저의 기원에는 다다르지 못할 겁니다. 어머니는 화석에서 꺼내지 못한 저의 심장에 대해 말했어요. 그때 그것을 꺼냈더라면, 너를 사막에 두고 오지는 않았을 거야. 저는 어른이 될 때까지 차가운 유방만 가지고 살았습니다. 이상하죠, 집으로 가는 골목에 들어서면 제 가슴 근처에서는 검은 손톱이 자라났어요. 저는 점점 더 뾰족하고 두꺼운 몸을 가진 박쥐가 되었습니다. 아저씨들도 죽은 역사 때문에 제 심장에 손을 넣고 입김을 불어넣었나 봅니다. 저는 많은 손을 가진 박쥐여자가 되었습니다. 지하에서 울려 퍼지는 성가는 부드러웠고요. 기도 시간이 되면 저는 까맣게 타오르는 손으로 제 유방에서 돋아난 수많은 손들을 잡았어요. 어린아이가 되고 싶은 아저씨들을 지나올 때마다 저는 어머니를 불렀답니다. 어머니는 마지막 문 뒤에 있었어요. 박쥐처럼 새끼들에게 거꾸로 매달리는 법을 가르쳤죠.





독서회

읽을 수 없는 문장처럼 생긴 것들이 가득해. 그녀는 망토를 벗었다. 눈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 나는 손에 든 책을 술집 바닥에 집어던지고 발로 밟고 있었다. 고통 받지 말자. 읽고 토하자. 그녀는 곧 튀어나올 부호처럼 웃으며 내 발을 만졌다. 이렇게 엄지발가락이 튀어 오르니 맨발로 읽어야지. 발바닥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 나라에 가보지 않고 그 나라의 불을 피우는 예언자처럼 모든 글자가 타올랐다. 나는 술집 바닥에서 조금씩 커져가는 불길이 되는 중이었다. 형태가 없는 것도 녹아서 재가 될 수 있구나. 아무리 불타올라도 차가운 발이 따뜻해지지 않았다. 깊이 들어가면 뭐가 있을까. 불길 한가운데 가장 깊은 어둠속에 담겨 있는 투명한 얼음. 그 나라에는 얼음으로 불길을 퍼뜨리고 쓰다 만 문장들이 후드득 떨어진대. 울음의 시작일지도 모르지. 그녀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눈을 비비자 술집의 모든 울음들이 테이블에서 타올랐다. 누군가 그녀의 발을 잡고 엎드렸다. 이것은 어떤 이의 몸의 조각인가. 도끼가 필요해. 그을린 짐승들이 몸을 뒤틀었다. 아무도 가본 적 없는 외딴 곳. 그 나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여름에는

내가 아는 밑바닥이 있다. 물이 가득하지. 나는 한 번씩 떨어진다. 물에 젖어 못 쓰게 되는 노트. 집에는 빈 노트가 너무 많다. 떠날 수가 없네. 밑바닥이 들어 있다. 자꾸만 가라앉지. 어디도 내 집은 아니지만. 첨벙거리며 잔다. 베개가 둥둥 떠내려간다. 괜찮아. 어차피 바닥이라 다시 돌아와. 그가 이마를 쓰다듬어준다. 그는 손이 없고 나는 머리가 없지만 침대는 둘이 누우면 꽉 찬다. 투명해질수록 무거워지는 침대 빈 노트 빽빽하게 무엇이든 쓰자.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는다. 무너지는 창문 밑에서 나는 썼다. 늘 물에 젖었다. 알아볼 수 없어서 너무 행복하구나, 라고 헐떡거리기도 했다. 한 번씩 떨어져서 내부로 들어가 본다. 여럿이 함께 잠들면 더 고요하고 적막해서 무서웠지. 그 사이로 물결 소리가 난다. 죽은 그가 아직도 책상에 엎드려 있다. 너는 모든 것을 쓰기로 했어. 나에게 보낸 편지처럼. 모든 것을 낱낱이 쓰기로 했지. 하지만 아무리 써도 채워지지 않는 물속. 아무리 쌓아도 그것은 언제나 사라진다. 한심한 놈. 죽은 그가 중얼거리며 나를 본다. 물이 뚝뚝 떨어진다. 떠날 수가 없구나. 나는 너의 신발을 썼다. 무거워서 다시 신을 수가 없는데, 나는 자꾸만 신발장에서 쓴다. 한 번씩 들어오는 내부라니. 문을 닫지 못해서 무엇이든 흘러간다. 비밀은 제대로 쓰이는 법이 없지. 쓸 수 없어서 조금씩 마모되는 것. 죽은 그가 나를 통과해 걸어간다. 부식되어가는 발로 걸어간다. 아무것도 쓰지 못해서 너는 이곳에 도달할 수가 없어. 진창에서 잠만 자는 너는. 그의 목소리가 멀어진다. 나는 그의 신발을 신고 있다. 둥둥 떠내려간다. 밑바닥에는 모든 것이 돌아올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