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화 시편 - 행성의 사랑>에서

고은

사랑은 사랑의 부족입니다

5월이었습니다 그다음 6월이었습니다
석곡대 석곡 꽃송이 피어왔습니다
더 가노라면
잔 어수리 흰 꽃들 피어왔다 피어갔습니다

이런 날인데요
해설피
바람 을스산스럽습니다

이제야 가만가만 알아버렸습니다

세상은
세상의 부족(不足)입니다
사랑은 자못
사랑의 부족입니다

나 어쩌지요

수십년 전 그날로
오늘도 나는 감히 사랑의 뗠려오는 처음입니다
다리미질 못한 옷 입고
벌써 이만큼이나 섣불리 나선
S를 만나러 가는 길입니다

허나 나 아직도 이 세상 끝 사랑을 잘 모르고 가기만 하며 갑니다





무덤

화장하지 않으리
풍장하지 않으리
티베트 아리 뒷산
조장하지 않으리

그누구한테도 늙은 구루한테도 맡기지 않으리

반야심경 사절

내가 씻기고
내가 입히고
내가 모셔넣고 난 뒤
내가 못질하리
내 울부짖음과 내 흐느낌 담아
엄중하게 못질하리

내가 흙 파내어
내가 묻으리

작은 빗돌 일깨워 세우리
여기 사랑이 누웠다고
감히 천년쯤 지난 뒤
나비도 강남제비도
이 무덤 속 백골 알 수 없으리





갈 곳

어떤 새는 한 번 울고 죽는단다 왜 그러는지 모른단다
대나무는
한 번 꽃 피고 죽는단다
잣나무는
한 이십년쯤 자라나
겨우 잣을 맺는단다
감히 그런 곳에 가고 싶구나
삶 또는 죽음
그런 곳에 가
며칠쯤 머물며 푹 썩어버린 눈물에 젖고 싶구나

사랑은 반드시 가고 싶은 곳이 있는 것
상화와 나는
아직도
아직도
갈 곳이 있다
오호츠크 바다
그 알류샨
북아프리카 앞바다 카나리아 제도

상화와 나는
나라 이름만 다시 보아도
땅 이름만 보아도
강 이름 레나 강
산 이름 월출산만 보아도

여기 가야지
여기 가야지

상화와 나는 갈 곳이 있다
동백꽃 지는 여수 돌산도
돌산도 건너
거문도
백도

들딸기 널린
서시베리아
거기 가
사흘쯤 머물고 싶다

상화와 나는
죽은 뒤에도 함께 갈 곳이 있다
저세상 십만억 국토 지나
거기 가
한생을 함께인 듯 아닌 듯 또 지내야 한다
그리하여 사랑은 이전에 갔던 곳 이후에 갈 곳
거기 가
머루나무 다래나무 설킨 비탈
푹 익은 술의 겨레붙이로
동틀 무렵
술 깨어나
또다시 떠나고 싶다

언제까지나 천치바보인 사랑 가고 가는 졸본부여 나그네란다





달밤

잠든 새 깨어나
화르르화르르 날아오르나
떠난 넋들
무엇하러 어룽져 오시나

이도 저도 아니다

지금 하마정 전부에 달빛이 온다 태고로부터 온다
하마정 전부가 달빛을 불러
달빛이 온다
하마정 건너
여기까지 숨차 달빛이 온다

어쩔 수 없다

2층 노대 여기에 태고의 둘이 있다
여기까지 달빛이 오고 만다
아래층 어린 포도들이
늙은 포도넝쿨에 달려 있다

어쩔 수 없다

둘이 얼싸안는다
달빛 무덤
달빛 구렁
둘의 나신이 온몸의 시설들의 가동한다
태고의 둘이
태고의 하나가 된다

찬 달빛이었다 뜨거운 달빛이었다
둘의 이승이
기어이 한몸뚱이의 정령이 되고 만다

숨넘어갔다
숨넘어갔다

달빛 오열
달빛 신음
그리고
달빛 기쁨
달빛 기쁨의 슬픔

아래층 포도들이 알알이 울었다

달빛 통곡

벌거숭이 둘의 나신이 가만히 정지된다
어느덧
달빛은 저만치 가 있다

어쩔 수 없다

둘이 현재로 돌아왔다 추웠다





고백

그곳에 수선화가 모듬모듬 피어 있듯이
새끼제비 주둥이
수선화꽃 피어 있듯이
그곳에 이끼가 끼어
한낮에도 어젯밤의 반지름이 남아 있듯이
그곳에 고사리들이 수군수군 모여 살고 있듯이
아무도 몰래
고사리 울음소리를 듣는
땅속 고사리 뿌리들이 쓰라린 어미로 살고 있듯이
그곳에 억새꽃들 휘날려 어디로 떠나는 듯이
그곳에 갈매기똥의 흰 바위가
밤이나 낮이나
파도소리에 선잠 깨는 듯이
나는
목마르다가
목마르다가
아내의 앞과
아내의 뒤에서
사뭇 서정과 서사의 경계를 넘었다
담 넘었다
울 넘었다
재 넘었다
56억 7천만년 중에서
30년을 넘었다

샘물 무지무지하게 깊어 태초같이 김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