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오래 머물렀을 때

이성미

입을 다물다


어디서 올까 그녀의 향기
몸 안에 양귀비꽃이 들어 있는 모양이다

어쩌다 입을 여는데
꽃잎들이 풀풀 나와
그녀와 나 사이를 떠다닌다

이것도 아름답지만
오래도록 그녀는 입을 다물고
그래서 나는 그 옆에 머물고





비밀


몰래 벌어지는 일들에서
설탕 묻은 장난감 냄새가 난다
태엽 인형의 벨소리
끊어질 듯 이어지고
등 뒤에선
낮은 북소리

모두가 잠든 밤에
자라는 숲
저물녘 피는 진홍색 분꽃
어딘가 묻혀 있을
버섯의 냄새

말이 내뱉어지는 순간
불투명 유리창에 금이 간다
마술이 끝나고
다락 문이 열릴 때
펼쳐지는
먼지 앉은 내부





달과 돌


돌이 식는다
밤의 숲 속을 헤매다 주운
창틀 위에 올려놓은

돌이 식는다
어두운 방에서 빛나던 돌
가만히 보면 내 눈썹까지 환해지던

그 둥근 빛 아래서
나의 어둠을 용서했고
침묵은 말랑말랑한 공을 굴렸다

들고양이가 베고 잤을까
고양이의 꿈을 비누방울로 떠오르게 하던
돌이 식는다

자줏빛 비가 내리고
벼락의 도끼날이
숲의 나무들을 베어버리는 동안

돌 위에 얹고 있는
내 손이 식는다

반달의
나머지 검은 반쪽이
궁금해졌다





나는 쓴다


물고기의 싱싱한 시체를
잎사귀에서 물방울이 증발한 흔적을
증기를 내뿜는
화물 기차의 검은 몸체를

수챗구멍에 엉켜 있는
늙은 남녀의 잿빛 머리카락을
쓰레기차에
내려앉은 환한 눈더미를
보도블록 틈
손가락만한 물웅덩이에
고인 달을

선호하는 콤플렉스의 목록을 작성하며
병원 수세식 변기 속
물에서 꼬물거리는 벌레 같은

서른다섯
죽기엔 너무 늦었고
내년 가을에도
황금빛 이파리들이 조용히 떨어질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