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other Man's City

Ch'oe In-ho

Illustration by Monika Grubizna

주택가와 상가가 교차하는 경계의 골목에 '에옹'이라는 간판이 있었다. 간판이 너무 작아서 사람을 유혹하는 옥외광고가 아니라 아는 사람들만 비밀리에 출입하는 접선 장소처럼 보였다.

K는 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가 지하실로 갔다. 지하로 가는 벽면 전체에 K의 침실에 걸려 있는 르누아르의 그림이 똑같이 그려져 있었다.

K는 문을 열고 카페로 들어갔다. 실내는 어두웠다. 작지도 크지도 않은 카페의 내부에는 벌써 대여섯 명의 손님이 앉아 있었다. 모두 여자들이었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K가 입구로 들어서자 넥타이를 맨 카페 종업원이 경계심을 드러내며 다가와 물었다. 종업원은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커피를 한잔 마실까 해서요."

K는 대답하였다.

종업원은 고개를 흔들며 말하였다.

"우리는 커피를 팔지 않습니다."

K는 종업원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실내에는 커피를 내리는 향긋한 냄새가 가득했고, 앉아 있는 여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커피가 든 잔을 들고 있었다.

"커피 향이 나는데요. 그리고 저기 앉아 있는 손님들도 커피를 마시고 있지 않습니까."

"아."

종업원은 머리를 끄덕이며 수긍하였다.

"평일에는 마실 수 있지만 오늘은 회원의 날입니다. 특별한 회원이 아니면 커피를 마실 수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오늘은 일요일 오전입니다. 일반 손님을 상대로 한다면 마땅히 가게 문을 닫아야 하지만 카페의 문을 연 것은 회원들 때문입니다. 다른 날 오시기 바랍니다. 죄송합니다."

종업원은 험악한 얼굴에 비해서 지나치게 상냥하였다. K는 P교수의 말이 떠올랐다.

"실은 손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아마도 이 카페의 회원 같은데요, 이름이 올렝카입니다."

"올렝카요. 올렝카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진작 말씀하시지요. 이리 오십시오."

종업원은 날카로운 눈빛이 되어 K의 모습을 머리에서 발끝까지 훑어본 후 구석진 자리에 안내하였다.

"혹시 피팅룸이나 파우더룸을 이용하고 싶습니까."

피팅룸이라면 옷을 바꿔 입는 탈의실을 의미하고 파우더룸이라면 화장을 고칠 수 있는 장소를 말한다. 그러나 이곳은 카페이지 수영장이나 연극 무대의 분장실이 아니지 않은가. K는 의아한 표정으로 종업원을 올려다보았다.

"아니요, 하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생각이 바뀌신다면 제게 말씀을 하십시오. 열쇠를 드리겠습니다."

종업원의 얼굴에 순간 비웃는 듯한 조소가 떠올랐다.

"커피를 한 잔 주십시오."

다행히 K가 앉은 곳은 흡연구역이었다. 흡연석이라는 팻말이 벽면에 붙어 있었다. K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피워 물었다.

어둠이 눈에 익자 카페의 실내가 한눈에 드러났다. K의 시선을 끈 것은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 있는 한 무리의 여인이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지나치게 눈에 띄는 옷을 입고 있었다. 그래서 옷이라기보다는 가면무도회용 무대의상처럼 보였다.

카페로 내려오는 계단 벽면에 그려진 르누아르의 작품 속 인물처럼 긴 드레스에 팔꿈치까지 오는 흰 장갑을 끼고 흰 모자에 우산까지 쓴 복장이어서 그림 속에서 튀어나온 모델들처럼 보였다. K는 그 여인들이 어딘가 부자연스럽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종업원이 커피를 가져왔다. 커피는 아주 맛있었다.

그때였다. 문에 달린 방울이 울리고 두 사람이 들어왔다. 종업원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것으로 보아 이 카페의 정식 회원인 모양이었다. 두 사람 다 말끔한 정장 차림으로 비교적 K와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커피가 나오자 두 사람은 말없이 커피를 마시면서 K를 쏘아보았다.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K를 의식하고 있었다. 의식한다고 해서 거리낄 것이 없어 K는 커피 맛을 즐기며 앉아 있었다. 잠시 후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종업원을 불러 뭐라고 귓속말을 하며 은밀하게 K를 가리켰다. K는 사내가 이 카페의 이방인인 자신의 정체에 대해서 종업원에게 묻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하였다. 종업원이 뭐라고 대답하자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무슨 물건을 받아 들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다른 사내는 여인들과 다정하게 눈인사를 하고는 가까이 다가가 뭐라고 떠들어댔다. 여인들은 합창하듯 호호호, 하고 웃었다. 여인들을 한바탕 웃긴 후 사내는 다시 돌아와 제자리에 앉았다. 여전히 그 사내는 K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었다.

K는 시계를 보았다. 10시 30분이 넘어서고 있었다. 아직 P교수는 소식조차 없었다. K는 빈 커피 잔을 들고 종업원을 불러 말하였다.

"커피, 리필 가능한가요."

"물론입니다."

종업원은 잔에 가득 커피를 따라 왔다.

K는 커피를 마시면서 피우던 담배를 눌러 껐다. 실내에서는 낯익은 팝송들이 계속해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흑인 오르페〉도, 〈검은 돛배〉라는 노래도 흘러나왔다. K는 두 사내 중 한 사람이 사라졌던 방향으로부터 여인 하나가 나타나는 모습을 보았다. 그 여인은 사내의 옆자리에 앉았다.

사라졌던 한 사내 대신 느닷없는 배우의 등장처럼 나타난 여인은 곁에 앉아 있던 사내의 담배를 빼앗아 피우기 시작하였다.

사라진 사내는 어디로 간 것일까.

음악 소리가 없으면 충분히 그들의 대화를 엿들을 수 있을 텐데, 음악이 적당한 크기로 방음벽 역할을 하고 있었다. 앉아 있던 나머지 사내도 일어섰다. 그 사내도 먼젓번 사내가 사라진 내실 쪽으로 들어갔다.

K는 다시 담배를 피워 물었다. 담배 말고는 딱히 시간을 보낼 만한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맛있던 커피도 두 번째 잔부터는 물렸다. 담배를 피우면서 K는 P교수가 언제 올까 하고 문 입구를 주시하였다.

잠시 후 두 번째 사내가 사라진 곳에서 또다시 한 여인이 나타나 그 여인 곁에 앉았다. K가 지켜보는 가운데 마술쇼를 벌이는 것 같았다. 어느새 두 사내가 사라지고 카페 안은 온통 여자뿐이었다. 남자는 K 혼자였다. K는 이곳이 매우 이질적이고 낯설게 느껴졌다.

문이 열리고 다시 한 사람이 들어왔다. K는 한눈에 P교수임을 알아차렸다. K는 일어나서 P교수를 맞았다.

"오래 기다렸지."

P교수가 K를 쳐다보며 말하였다.

"막 떠나려는데 아내가 할 말이 있다고 해서."

K는 P교수가 말하는 아내가 처음에는 누이가 아닌가 생각하였다가 그럴 리가 없다고 판단하였다. 곧 P교수가 새로 결혼한 두 번째 아내를 말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두 번째 아내를 맞기에 P교수는 많이 늙어 있었다. 10년 만에 만났지만 P교수는 완전히 노인이 된 느낌이었다. 흰머리는 물론 몸도 많이 야위고 등은 굽어 있었다.

"미안하게 됐어."

P교수가 거듭 사과하자 K는 대답하였다.

"아, 아닙니다."

P교수가 자리에 앉자 종업원이 다가왔다.

"열쇠를 드릴까요."

"내 넘버를 알지요."

"12번, 맞습니까."

종업원이 대답하였다.

"그렇소. 12번이 내 열쇠 번호요."

종업원의 말대로 P교수에게 건네진 열쇠에는 '12'라고 쓰인 동그란 플라스틱 표가 붙어 있었다.

"커피도 한 잔 주시오."

P교수가 말하자 종업원은 대답하였다.

"알겠습니다, 올렝카 회원님."

P교수는 탁자 위에 종업원으로부터 받은 열쇠를 올려놓았다.

"자넨 얼굴이 좋아 보이는군. 아이는 몇인가."

"그대로 딸아이 하나입니다."

"참 오래 못 봤지, 세월이 많이 흘렀군."

P교수는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K는 P교수 양쪽 귓불에 매달린 금속 제품을 보았다. 귀고리였다. K는 의아하였다.

쉰 살 중반이 넘은 교수가 양쪽 귀에 귀고리를 달고 있다니.

"10여 년쯤 되었지, 자네를 못 본 지가."

"그렇게 되었을 겁니다."

"세월이 많이 흘렀군. 그동안 많은 것도 변하고 말이야."

"변한 것은 없습니다."

K는 대답하였다.

"내겐 10여 년 동안 변함이 없습니다. 10년 뒤에도 그럴 겁니다."

K의 말은 의도와 다르게 철학적인 메시지가 되었다. P교수는 인문학 교수답게 K의 개똥철학에 수긍을 하였다. 커피가 오자 P교수는 말을 끊고 잠시 커피 맛을 음미하였다. 뭔가 중요한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 타이밍을 고르는 듯 보였다.

"미리 얘기하겠지만."

긴 침묵 끝에 P교수가 말하였다.

"나는 이제부터 다른 사람으로 변신할까 하네. 양해를 구해두지만 자네는 내 변신에 깜짝 놀랄지도 모르겠네."

"상관없습니다."

K는 별 의미 없이 대답하였다.

"카프카의 변신처럼 갑자기 다족류 벌레가 되지만 않으신다면 크게 놀라지 않을 겁니다."

K는 P교수가 영문학을 전공하였으므로 문학적 수사법을 사용하였다.

"어쩌면 다족류 벌레보다 더 놀랄지도 모르지. 어쨌든 기다려보게. 파우더룸에 잠깐 다녀올 테니까."

P교수는 열쇠를 들고 카운터 안쪽으로 사라졌다.

K는 P교수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하였다. 변신이라면 변장이나 변복처럼 단순히 외향의 모습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배추벌레가 나비가 되는 것처럼 본태가 바뀌는 탈바꿈을 의미한다. 알에서 부화한 동물이 성체가 될 때까지 여러 형태로 변하는 변태變態를 뜻하기도 하는데, 그렇다면 P교수는 드라큘라와 같은 흡혈귀로 변신한다는 것일까. 화가 나면 초록빛 근육질의 괴물로 변하는 SF영화의 주인공처럼 P교수가 헐크로 변한단 말인가.

K는 식은 커피를 찔끔찔끔 마시면서 P교수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한참 후, 밀실로부터 한 여인이 나타나 K를 향해 앞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낯익은 모습의 여인이었다. 여인 역시 카페에 앉아 있는 다른 여인들처럼 복고풍의 서구적 복장을 하고 있었다.

"오래 기다렸지."

여인이 K에게 웃으며 말하였다. K는 어리둥절하였다. 생면부지의 여인이 K에게 다가와 다정하게 말을 걸었기 때문이다.

"이 사람아, 날세."

여인은 자신의 가슴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그녀가 가리킨 가슴은 지나치게 크고 볼륨이 있어 보였다. K는 그녀가 다름 아닌 P교수임을 알아차렸다. 그제야 P교수가 말하였던 변신이라는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었다. K는 더 이상 어리둥절해하지 않았다.

"자네는 무엇을 좋아하나."

그녀, 아니 K의 한때 매형이었던 P교수는 불쑥 K에게 물었다.

"이를테면 취미활동 같은 것 말일세. 등산이나 우표 수집, 골프와 같은 레저활동 말이야."

"글쎄요."

K는 생각하였다.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없다고 하면 그녀의 질문을 묵살하는 것 같아 머뭇거리며 대답하였다.

"일주일에 한 번씩은 성당에 갑니다. 그것이 딱히 취미활동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종교도 취미라고 할 수 있지. 자네가 일주일에 한 번씩 성당에 가는 것처럼 나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이곳에 들러 여장남자가 되네. 여장남자가 내 취미일세. 의학적 용어로는 '에오니즘Eonism'이라고 부르지. 루이 15세 때, 최고의 여장미인으로 사교계의 꽃이 된 프랑스 외교관 '에옹'의 이름을 본떠 '에오니즘'이란 단어가 탄생된 거네."

K는 카페의 이름이 어째서 '에옹'이라는 낯선 단어를 사용했는지 그 연유를 알 수 있었다.

"자네가 기다리고 있어서 내가 업up은 했지만 아직 풀업full up은 하지 못했네. 업이란 여자의 옷으로 바꿔 입는 것이고, 풀업이란 완전히 화장까지 끝난 후의 변신을 뜻하는데, 자네 때문에 화장은 꼼꼼히 하지 못했어. 자네가 양해해준다면 여기서라도 화장을 하고 싶은데, 괜찮겠나."

"물론입니다, 교수님."

P교수는 들고 있는 명품 핸드백에서 거울과 화장품 세트를 꺼냈다. 탁자 위에 거울을 고정시켜 놓고 P교수는 화장을 시작하였다.

"지금 이 순간부터 나는 대학 교수도, 자네의 매형도 아닌 올렝카라는 여인이야. 자네도 나를 올렝카라고 불러주게나."

"알겠습니다, 올렝카님."

K는 겸연쩍지 않았다. P교수가 원하는 대로 불러줄 자신이 있었다. K도 베드로나 피터라는 세례명으로 불리지 않는가. 아내의 세례명은 엘리자베스다. P교수가 올렝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는 것도 특별히 이상한 일은 아니다.

"님 자는 빼주게. 그냥 다정하게 올렝카라고 불러주게."

"알겠어요, 올렝카."

P교수는 순간 환하게 웃었다. 그 얼굴은 기쁨에 넘쳐 있었고 행복에 겨운 신혼의 새색시 같은 표정이었다. K는 어느 시인이 이름을 불러주자 내게 와서 꽃이 되었다고 노래하였듯 올렝카라는 이름을 부를 때마다 P교수가 행복감을 느끼며 피어나는 꽃처럼 화사해짐을 느꼈다. 안쓰러운 것은 화사한 표정을 짓기에 P교수는 너무 늙어 있었고, 정교하게 여장을 하였지만 팔뚝에는 수북이 털이 나 있었다. 목소리는 일부러 여성화하기 위해 가성을 쓰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어, 언밸런스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P교수가 쓴 여성용 가발은 예외적으로 올렝카와 아주 잘 어울렸다. 올렝카는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속눈썹에 마스카라를 칠하고 입술에 새빨간 립스틱을 바르는 등 일련의 화장 작업을 계속하였다. 올렝카는 마치 성욕을 느끼는 변태성욕자처럼 눈빛을 번뜩이고 있었다.

"내가 내 안에 들어 있는 여성성을 발견한 것은 40대 중반 이후였네. 어느 날 낯선 골목을 지나다가 빨랫줄에 걸린 여자의 속옷을 보고 그것을 훔쳤지. 그리고 한번 입어보았는데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어. 일찍이 그리스의 시인 아리스토파네스는 플라톤의 「향연」에서 말하였다네. 태초에 남자와 여자, 그리고 남자이며 여자인 세 가지 성性이 있었다고. 남자는 해이며, 여자는 땅, 남자이며 여자는 달이었지. 남자이자 여자인 제3의 인간은 점점 교만해져서 제우스의 눈에 거슬릴 정도가 되었어. 그러자 제우스는 제3의 인간을 둘로 갈라놓았고 그렇게 둘로 떨어진 인간은 서로 반쪽을 찾아 방황하게 되었네. 남자이자 여자인 제3의 인물이야 말로 인간의 원형이며, 미래에 있어서도 가장 진화된 호모루덴스라고 할 수 있지. 남자이자 여자인 제3의 인간이 늘어난다면 성범죄나 성차별, 사회적 부조리 등은 자동적으로 해결될 걸세. 그리고 가정은 보다 자유롭고 일종의 성의 해방구 역할을 할 것이 분명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오해하지는 말게. 나는 양성애자도 아니고, 동성애자는 더더욱 아니네. 어디까지나 여장에서만 성적인 흥분을 느끼고 여장을 할 때만 변신하는 것뿐이야. 이것은 오로지 심리적 안정 때문이지. 우리를 동성애자로 생각하고 접근하는 사람이 있을 때는 견딜 수 없는 혐오감을 느낀다네. 나는 얼마든지 남편이 아내 역할을 동시에 할 수 있고, 여자가 남자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 성은 얼마든지 공산共産화할 수 있으며, 가정은 소유욕이나 질투심이 없는 지상의 낙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네."

"교수님이 이렇게 일주일에 한 번씩 올렝카가 되는 것을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

"전혀 모르지. 아내도 모르고, 아이도 모르고 있네. 참, 자네 누이와 이혼한 뒤 5년 후에 나는 재혼을 했네. 기분이 언짢은가."

"아닙니다, 올렝카."

"올렝카라는 이름이 아름답지 않은가."

"특이한 이름입니다. 미국이나 영국 이름은 아닌 것 같고."

"러시아 이름이네. 안톤 체호프의 단편소설 「귀여운 여인」에 나오는 여주인공 이름일세. 사랑스럽고 제목 그대로 귀여운 이름이지."

"귀여운 여인이 되고 싶습니까, 올렝카."

장난을 걸 속셈으로 K가 물었다. 거울을 들여다보던 올렝카가 거울 속에서 K의 눈과 마주쳤다. 순간 K는 P교수의 눈에서 교태를 보았다.

"그럴 수만 있다면. 아아, 그럴 수만 있다면."

남성의 성기가 달린 P교수는 어머니의 자궁 속으로 거꾸로 뛰어들고 싶어 한다. 그리하여 사랑스럽고 귀여운 여인으로 다시 태어나길 원한다.

"내가 자네를 이곳에서 만나자고 한 것은 오늘이 일주일에 한 번씩 있는 회원의 날이고 이날을 그냥 허비해서 넘기면 심리적 공황에 빠져 일주일간 고통을 느끼기 때문이었네. 일종의 월경과 같은 생리 현상이지. 물론 자네는 내 비밀을 지켜주리라 믿어. 그래서 여기서 만나자고 한 것이지만."

드디어 화장이 끝났는지 파우더로 얼굴을 두드리고 나서 올렝카는 거울을 닫고 화장품 세트를 핸드백 속에 집어넣었다.

전보다 한결 여성성이 강조되었지만 여전히 기괴한 모습이었다. 이런 복장으로 거리에 나간다 해도 무리는 없어 보였다. 거리의 사람들이란 웬만하면 남의 모습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P교수는 충분히 올렝카의 귀여운 여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눈치 빠른 사람이 P교수의 정체를 알아차린다 해도 그것이 범죄행위가 아닌 이상 올렝카는 P교수의 말대로 해방구의 거리에서 자유를 느낄 것이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세. 3년 전까지만 해도 자네 누이와 연락을 했으니까, 이 전화번호는 바뀌지 않았을 걸세."

K는 올렝카가 건네준 메모지를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자네 누이는 참 좋은 사람이었네. 누이는 자네를 정말 사랑했어. 언제나 말끝마다 내 동생 내 동생 하고 걱정을 했지. 물론 나도 자네를 좋아했었네."

"알고 있습니다, 올렝카."

"3년 전에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재혼했다는 연락이 왔었지. 정말 행복하길 바라네."

"저도 그렇습니다, 올렝카."

"전화로 누이의 연락처를 가르쳐줄 수 있었는데도 내가 오늘 자네를 이렇게 만나자고 한 것은 오래간만에 내 아들에게 선물을 사주고 싶어서였네. 자네도 알다시피 자네의 누이와 나 사이에는 아들이 하나 있지 않은가. 오래전에는 가끔 만나기도 했지만 나 역시 새장가를 들고 나서는 완전히 연락이 끊겼네."

"아들이었습니까."

"아들이었지. 그래서 오랜만에 애비로서 아들에게 선물을 주고 싶네. 누이를 만나게 되면 선물을 나 대신 전해주지 않겠나."

"물론입니다, 올렝카."

"요 앞 로터리에 백화점이 있네. 올 때 보니 마침 세일기간이더군. 괜찮다면 자네와 함께 백화점에 가고 싶은데, 괜찮을까."

"물론입니다, 올렝카."

"내 모습 때문에 함께 가기가 거북하다면 자네가 앞장서고 내가 몇 걸음 떨어져 가기로 하세."

"상관없습니다. 지금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그럼, 가기로 할까."

K는 올렝카와 함께 일어섰다. 종업원이 오자 올렝카가 말하였다.

"여기 백화점에 다녀올게요. 커피 값은 다녀와서 계산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올렝카 회원님."

두 사람이 문 입구로 나오자 앉아 있던 여인들이 모두 일어섰다. 올렝카에게 연장자의 예의를 갖추는 모양이었다.

"잘 다녀오세요, 올렝카 언니."

K가 변신한 모습을 확인했던 두 사내 중 한 사람이 다정하게 하얀 손을 흔들며 인사하였다. 올렝카는 두 사내에게 다정스런 말을 던졌다.

"반가워요, 제시카. 그리고 난정이도."

인사를 건네고 나서 올렝카는 계단을 올라 거리로 나갔다. 가을 햇살이 깨어진 유리 조각처럼 골목길 위에 박살이 나 있었다. 눈이 부신 듯 올렝카는 핸드백에서 선글라스를 꺼내 쓰고 양산을 펼쳐 들었다. K는 올렝카가 양산만은 쓰지 않았으면 하였다. 그 양산은 고전적이어서 벼룩시장 같은 데서 파는 앤티크한 골동품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양산은 사람들의 시선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표적이 되고 있었다. 거리의 사람들은 대부분 흘깃거리며 올렝카를 보았지만, 정작 본인은 오히려 그 시선을 즐기는 듯하였다. K 역시 개의치 않기로 하였다.

"팔짱을 끼기로 하지."

올렝카가 장갑을 낀 손을 내밀었다. K는 올렝카와 팔짱을 끼고 나란히 걸었다. 처음에는 올렝카가 자신이 여인으로 변신하였음을 만끽하기 위해 팔짱을 낄 것을 제안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잠시 후 K는 올렝카가 그 같은 제안을 왜 했는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올렝카가 신은 구두의 굽이 지나치게 높아 충분한 연습을 하였다 하더라도 걷는 것이 불안하고 위태로웠기 때문이다. 팔짱을 끼자 두 사람은 마치 다정한 연인처럼 보였다. 백화점 광장에서는 한 무리의 젊은 아이돌 그룹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아악 아악거리는 소녀 팬들의 함성이 들렸다. 올렝카가 그 가수들의 모습을 감상하고 싶어 했으므로 K는 함께 발걸음을 멈춘 후 노래하고 춤추는 가수들의 공연을 보았다.

"이따금 이렇게 여장을 하고 올렝카로 변신하면 격렬한 성적 충동을 느낀다네. 수음手淫을 해서라도 성적 충동을 해소하고 싶지만 나는 그것을 자제하고 있네."

올렝카는 별 뜻도 없이 혼자서 독백한 후 백화점 안으로 K를 이끌었다. 상점 위치를 잘 알고 있는 듯 올렝카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3층 매장으로 갔다. 그곳은 주로 여성들을 위한 전문 매장들이 있는 플로어였다. 사람들의 집중되는 시선을 무시하고 양산을 접은 올렝카는 빠른 걸음으로 여성들의 속옷을 파는 상점 앞에 가서 섰다.

"살 생각은 없네. 그러나 아이쇼핑은 하기로 하지."

올렝카가 매장 안으로 들어서자 낯이 익은 듯 판매원들이 몰려와 올렝카를 맞았다. K는 쇼핑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남편처럼 매장 의자에 앉아서 휴식을 취하였다.

매장 안에는 각종 여성 속옷이 진열되어 있었다. 가슴을 가리는 브래지어와 매춘부들이나 입을 만한 자극적이고 원색적인 팬티, 슈미즈와 같은 속치마, 드로어즈처럼 생긴 속바지, 탑과 같은 각종 언더웨어들이 즐비하였다. 올렝카는 일일이 점원의 안내를 받으며 이를 꼼꼼히 체크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만발한 꽃이 피어 있는 정원을 산책하는 듯한 행복감으로 충만하였다. 기어이 마음에 들었는지 망사스타킹과 포르노 배우들이나 입을 팬티를 사서 쇼핑백에 넣었다. 그 팬티는 올렝카의 성기를 감출 수 없을 만큼 작고, 무게를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투명하고 얇았지만 올렝카는 매우 만족해 보였다. K는 올렝카가 만족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였다.

다음에 간 곳은 영캐주얼 매장이었다. 열 살부터 열여덟 살 정도의 청소년들이 입을 만한 옷 중에서 올렝카는 겨울에 입을 수 있는 방한복과 바지 하나를 산 후 말하였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열세 살이 되었겠지만 일부러 열다섯 살 정도의 애들이 입을 만한 옷을 골랐네. 작으면 입을 수 없지만, 크면 언젠가는 입을 수 있으니까. 이것을 전해주겠나."

올렝카는 포장된 옷가지가 들어 있는 쇼핑백을 K에게 건네주었다.

"틀림없이 전하겠습니다, 올렝카."

"선물과 더불어 이 말도 전해주겠나. 이 애비가 사랑하고 있다고 말일세. 아니면 보고 싶어 한다고. 두 말 중에 하나는 자네가 그때 상황을 보고 선택해서 전해주도록 하게."

K는 올렝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올렝카는 아들을 사랑하지도, 보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그런 말은 손님을 왕처럼 모신다는 백화점의 캐치프레이즈와 같은 선전 문구다.

그러나 K는 대답하였다.

"그 말을 전하겠습니다."

두 사람은 백화점을 나섰다. 거리로 나오자 올렝카는 양산을 폈다.

"여기서 헤어지도록 하세. 어차피 나는 '에옹'으로 돌아가야 하니까."

"커피 잘 마셨습니다, 올렝카."

"잘 가게."

올렝카는 장갑을 낀 손을 내밀며 말하였다.

"악수를 할 때는 장갑을 벗어야 하지만 지금의 나는 올렝카이니까 장갑을 낀 그대로 하겠네. 여자들은 악수를 할 때 장갑을 벗지 않더라도 에티켓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니까."

두 사람은 악수를 나누었다.

백화점 정문 앞에서 두 사람은 헤어졌다. 올렝카는 다시 카페로 돌아가기 위해 골목 쪽으로 걸어갔다. K는 주차장으로 가기 위해 반대편으로 한참을 걷다가 돌아서서 올렝카를 확인해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큰 키에 하이힐까지 신은 거인 하나가 둥둥 떠 흐르는 인파 위에서 넘치는 홍수에도 버티고 선 미루나무처럼 우뚝 서서 걸어가고 있었다.


Another Man's City is published as a part of Dalkey Archive Press's Library of Korean Litera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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